강남, 위워크,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세 키워드에 강한 불신을 갖게 된 나는 한국의 실리콘 밸리라는 판교로 다음 목적지를 정했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특성상 IT 회사로 구직을 많이 했는데 대부분 판교에 밀집해 있다는 걸 알게 되서다. 그리고 그때쯤 자취도 계획 중이어서 강남에 사는 것보단 회사와 가까운 곳에 거주하며 출퇴근을 편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또다시 이력서 뿌리기가 시작됐고 나는 귀국 후 약 3개월 만에 한 스타트업에 브랜딩 디자이너로 취직을 하게 됐다.
이 회사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은 중견기업이 된 모회사의 CMO를 역임하고 퇴사한 마케터가 차린 회사였는데 일단 소프트웨어 개발 따위가 아니라 B2B 구독 서비스를 하는.. 그런 회사였다. 사업 모델이 확실해 보여서 신뢰도가 상승했고 대표도 믿을만한 사람처럼 보였다. (일단 출신이 확실) 급한 성격 때문에 30분 정도 면접에 일찍 도착해서 로비에 대기를 하다가 면접을 보러 들어갔더니 사업팀장이라는 사람이 나와 "죄송해요. 저희가 평소엔 이렇게 바쁘지 않은데 오늘 좀 바쁘네요." 라며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트기 시작했다. 일단 사무실도 공유 오피스가 아니었고 (그래 봤자 돈 내고 빌리는 거지만) 직원들도 전부 여자였다. 분위기 자체가 밝고 영한 느낌이라 여기서 일을 하면 편한 분위기에서 실무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회사의 브랜딩이 참 중요하다고 느낀 게, 이 회사의 로고와 소개 문구 등이 나름 트렌디했는데 그걸 보고 지원한 지원자들+대표의 커리어를 존경해 지원한 마케터들이 대부분이었다. 나 또한 전자의 이유로 회사를 택한 게 팔 할이었으니..
여기에서는 약 반년을 근무했는데 짧은 근무 기간 동안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의 업무를 다 한 것 같다. 학부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달까. 패키징, 인쇄부터 시작해서 웹사이트, 뉴스레터, 브로셔, 공간 디자인, 프로모션/광고, 촬영, SNS 마케팅 디자인, 유니폼 제작 등 그냥 포토샵을 켜야 하거나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모든 업무를 혼자 도맡아 했다. 전임자가 일을 정말 잘했다고 하는데 그분이 왜 맨날 테라스에서 줄담배를 태우셨다고 하는지 난 입사 일주일 만에 알게 되었다. 탕비실에 매트리스가 있을 때부터 도망쳐야 했는데..
에이전시에서 룰루랄라 일을 하다 온 순진한 나와는 달리 같이 일을 한 직원들은 기본이 대기업, 최소 중견기업 출신에 평균 경력이 7년 차인 베테랑들이었다. 덕분에 전임자들의 단체 퇴사로 체계라고는 1도 없던 회사에 체계를 만들고 각자의 R&R을 능수능란하게 분배해 업무를 처리했다. 허구한 날 개발자들이랑 싸우며 웹사이트나 만들던 나는 마케터들과의 협업이 처음이었고 기획과 광고에 대해 처음 배운 순간이기도 했다. 마케터 출신 대표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그들이 얼마나 부담되고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을까 나는 지금에서야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대기업 CDO 출신 대표 밑에서 일을 하면 그런 기분일까? 아무튼 다들 열정이 넘치는 직원들과 함께하니 나도 뭔가 된 것 같고 애사심이 차올랐다.
처음 몇 주는 야근도 방긋방긋 웃으면서 하고, 항상 '솔'톤으로 얘기를 하며 해피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다녔다. 설거지도 신나서 하고, 직원들 밥을 챙겨서 시켜주고, 대표의 허튼소리에도 열심히 딸랑거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되는 철야로 심신이 지치면서 점점 얼굴에 웃음기가 쏙 빠졌다. 주말엔 친구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었고, 주중엔 기계처럼 일을 하고 집에 와서 잠만 몇 시간 자고 바로 출근을 하는 식이었다. 12시 전에 퇴근을 하면 교통비도 지원을 안 해주는 바람에 사무실에 굳이 12시까지 있다가 간 적도 더러 있었다. 그마저도 택시가 안 잡혀 오밤중에 판교를 서성인 적도 부지기수. 회사에 이런 말을 하면 우리가 언제 그랬냐 우린 야근 없는 회사다!라고 못을 박겠지만 그땐 기본 퇴근이 저녁 9-10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