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쌍화차의 쓴맛을 알게 되는 것

한의사, 지휘자, 역사학자, 인생 선배의 찻잔에 담긴 네 가지 이야기

by BREWOLOGY

그 쌉쌀한 매력에 대하여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오랫동안 쌍화차를 '어른들만 마시는 쓴맛의 음료'라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 손 잡고 갔던 한약방에서 나던 그 냄새. 검고 끈적이며, 뭔가 쓰디쓴 그 맛. "몸에 좋으니까 마셔"라는 말과 함께 건네받던 그 한 잔이, 어린 저에게는 그저 고역이었죠.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 지독한 몸살을 앓고 난 뒤, 어쩔 수 없이 마셨던 뜨거운 쌍화차 한 잔이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시며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더라고요. 그 경험 이후, 이 음료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쌍화차의 진짜 매력은 달콤한 위로가 아니라, 쓴맛으로 우리를 다잡아주는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닐까요?

오늘은 각 분야의 친구 네 명과 함께, 이 기묘한 맛에 담긴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한의사 친구의 설명: "이름에 모든 게 담겨있어요"

"쌍화(雙和)가 뭔지 알아?"

한의사 친구가 물었습니다. '쌍(雙)'은 둘, '화(和)'는 조화. 즉, '서로 다른 두 기운이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라고 하네요.

우리 몸의 '기(氣)'와 '혈(血)', 쉽게 말하면 에너지와 영양분이 모두 바닥났을 때, 이 둘의 균형을 동시에 맞춰주는 게 쌍화탕의 역할이랍니다.

숙지황, 당귀, 천궁, 황기... 각기 다른 성질을 가진 십여 가지 약재들이 하나의 탕기 안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또 서로를 돕고, 마침내 하나의 완벽한 '조화'를 이뤄낸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듣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장 건강한 관계도 비슷한 게 아닐까? 무조건 좋은 점만 보는 게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 말이죠.

작은 발견: 가장 위대한 조화는, 모든 것이 같을 때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기꺼이 공존할 때 시작된다.


지휘자 친구의 비유: "최고의 불협화음"

"쌍화차는 말러의 교향곡 같아."

오케스트라 지휘자 친구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은 처음 들으면 굉장히 복잡하고 귀에 거슬립니다. 근데 그 모든 소리가 쌓이고 쌓여 마지막엔 전혀 예상 못 한 장엄한 화음을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쌍화차도 마찬가지래요. 단맛, 쓴맛, 신맛, 쌉쌀함, 흙냄새, 풀냄새... 각각의 약재가 내는 개성 강한 맛들은 그 자체로는 너무 거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맛의 충돌'이 역설적으로 쌍화차만의 깊이를 만든다는 거죠.

만약 쌍화차가 그냥 달기만 했다면? 우리는 금방 질렸을 겁니다. 우리를 매료시키는 건 완벽한 조화가 아니라, 그 조화 속에서 언뜻언뜻 튀어나오는 거칠고 개성 넘치는 맛들이라는 겁니다.

작은 발견: 가장 깊은 매력은 완벽한 조화가 아니라, 각자의 개성이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함께 어우러지는 아슬아슬한 균형에 있다.


역사학자 친구의 기록: "왕의 피로를 풀던 한 잔"

"쌍화차가 원래 왕실 보약이었던 거 알아?" 역사가 친구가 말합니다.

조선 시대,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왕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어의들이 최고의 약재만을 골라 달여 올렸던 게 쌍화탕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왕의 건강은 곧 나라의 안위였으니까, 이 한 잔에는 당대 최고의 의학과 정성이 담겨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 왕의 탕약이, 세월이 흘러 지금은 동네 다방 메뉴판 한구석에 있고, 감기 기운 있는 우리 손에 들려있다는 게 참 신기하지 않나요?

어쩌면 우리는 쌍화차 한 잔으로, 수백 년 전 이 나라의 무거운 짐을 짊어졌던 왕의 고단함을 함께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동시에, 왕의 탕약이 이제 평범한 나의 피로를 풀어준다는 사실에서 묘한 위안을 얻고 있는 거겠죠.

작은 발견: 가장 평범한 것 속에 가장 비범한 역사가 숨어있고 우리는 매일 과거의 누군가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마시고 있다.


인생 선배의 지혜: "쓴맛 위에, 고명 하나"

"인생이 쓰다고 느껴질 때, 쌍화차를 마셔봐."

오랜만에 만난 인생 선배가 조용히 찻잔을 건넸습니다.

그는 쓴맛을 피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쓴맛을 어떻게 '품위 있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줬죠.

쌍화차의 진짜 지혜는 그 쌉쌀한 탕약 위에 띄우는 잣과 대추에 있다고 합니다. 이 작은 고명들은 탕약의 쓴맛을 완전히 없애주지 못해요. 하지만 우리는 그 쓴맛 사이에서 잣의 고소함과 대추의 은은한 단맛을 발견하며, '아, 이 쓴맛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겠죠. 우리는 인생의 쓴맛을 완전히 없앨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 쓴맛 속에서도 아주 작은 기쁨, 사소한 행복을 '고명'처럼 띄워 올릴 줄 아는 지혜를 배울 수는 있어요.

그게 바로 쓴 인생을 견디는 게 아니라, 기꺼이 '음미'하게 만드는 어른들의 진짜 노하우일 겁니다.

작은 발견: 가장 위대한 지혜는 쓴맛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쓴맛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들 아주 작은 단맛 하나를 띄울 줄 아는 것이다.


당신의 잔에 담긴 가장 성숙한 위로

결국 이 검고 쓴 한 잔에는 우리가 어른이 되어가며 배우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나 봅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조화의 기술.

그 조화 속에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개성의 가치.
가장 평범한 오늘 속에 숨겨진 역사의 무게.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쓴맛을 기꺼이 껴안게 만드는 아주 작은 지혜의 고명까지.


이제 당신 앞의 검고 뜨거운 잔을 다시 보세요.

그 안에는

수많은 부딪힘 속에서도 마침내 당신만의 조화를 찾아낸 어제의 당신과,
쓰디쓴 현실 속에서도 작은 기쁨을 찾아내어 오늘을 살아낼
당신의 가장 단단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혹시 오늘 유난히 인생이 쓰게 느껴진다면, 주저 말고 이 쓴 잔을 들어 올리세요.

그리고 그 쓴맛 끝에 찾아오는 아주 작은 단맛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겁니다.

"그래, 이만하면 제법 잘하고 있어."

그것이 바로 쓴맛을 아는 우리만이 누릴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깊고 따뜻한 위로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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