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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민철 Brian Feb 17. 2020

신사업에 대한 환상을 지닌 모든 스타트업 주니어에게

차라리 구조조정 당해서 다행이다

이 글은 블록체인이라는 신사업을 2년 동안 경험한 스타트업 주니어가 신사업에 대한 환상을 지닌 모든 예비 주니어들에게 쓰는 글이다.

어떤 생각으로 블록체인 산업에 들어오게 되었고, 수많은 경험 속에서 어떠한 생각들을 했는지, 지금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쭉 적어보려고 한다.

나의 경험과 생각의 고리들이 정답은 아닐 수 있지만, 별거 아닐 수 있는 내 기록이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생의 정답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분명 의미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신사업에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까?



멋들어지고 미래 지향적인 이미지.

신사업 혹은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이미지를 검색할 때 나오는 이미지들의 공통점이다. 

과연 신사업은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이 그렇게 특별할까?

사람마다 정의가 다르겠지만, 나는 학창시절에 신사업을 ‘신기술 기반의 비즈니스’로 정의를 내렸었다.

AI, 사물인터넷, 자율주행과 같은 혁신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사업하는 영역을 의미한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신사업에 대한 첫인상은 두려움과 동경 모두였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는 미래가 급변할 것이고 그것에 대비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이라는 두려움, 그리고 베일에 싸여있는 신사업의 영역에 진입하고 싶다는 동경이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사라질 직업들에 대한 미래 보고서를 읽고,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4대1로 지는 모습 등을 라이브로 보면 누구나 그러한 마음이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호기심에 다른 학생들이 절대평가 수업들이나, 과제를 덜 내고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는 꿀 수업들만 골라 들을 때 일부로 그 반대로 행동했다.

블록체인, AI, 로봇 공학, 자율주행, 사물 인터넷 등 4차 산업 혁명 관련 수업들을 골라 듣기를 좋아했고, 수업을 들을 때마다 호기심은 점점 동경으로 바뀌었다.


단순 동경뿐이었던 내 마음에 신사업 커리어에 대한 확신을 주게 된 계기는 '쫄지말고 투자하라'(줄여서 쫄투)라는 스타트업 토크쇼였다.

쫄투 서포터로 일을 돕던 나는 수많은 블록체인 대표님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열정과 변화에 대한 묘한 믿음에 동조되었다.

내 가치관에 영향을 주었던 대표님들이 하나둘씩 '블록체인'을 외치는 모습을 보다 보니 자연스레 정말 그 길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처럼 세상의 변화에 앞장서고 싶었다.


정말 그때는 신사업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했다..


얼마나 멋진가? 그 누구도 완벽히 개척해보지 않은 기술의 영역에서 한 획을 긋는 모습이..

그만큼 미지의 영역을 도전한다는 것에 대한 환상과 나는 꼭 그 과정에서 성공하리라는 묘한 믿음이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나는 비개발자 주니어라도 신사업 초기에 진입하면 산업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하고 인정받을 수 있으라는 확신을 했다. 

결론적으로 지금은 취업 2년 차에 2번이나 구조조정을 경험한 주니어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야호! 나는 구조조정 전문가)



지금은 신사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학창시절에 바라보던 신사업에 대한 생각과 2년 동안 직접 일을 해본 지금의 신사업에 대한 생각은 꽤 다르다.

아니, 많이 다르다.

앞서 언급했던 아래 문장을 토대로 어떤 점들이 다른지 하나씩 짚어보겠다.


"비개발자 주니어라도 신사업 초기에 진입하면 산업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하고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했다."
 

1) '비개발자 주니어라도 신사업 초기에 진입하면'


아직 개척되지 않은 신기술을 기반으로 사업할 때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무엇일까?

바로 기술 고도화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우선, 기술이 아직 고도화되지 않았기에 기술 고도화를 할 수 있는 개발자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회사의 핵심 인력은 기술을 고도화시킬 개발자라는 뜻이다.

사실 모든 IT 기업들의 핵심 인력은 개발자이지만 신기술 기반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곳은 그러한 편향이 더더욱 심하다.

회사 차원에서는 정말 개발을 잘하는 주니어가 아니고서는 주니어를 핵심 인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회사 경영진과 면담을 할 때 이런 말도 들었다.


"당신이 누구보다 우리 회사와 서비스를 좋아하고, 성과를 내는 것도 알지만, 마케팅이 왜 필요한지 아직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마케터를 왜 뽑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만큼 당시 경영진은 제품 고도화에 더욱 집중하고 싶어 했던 것 같지만, 이 말이 나에게는 상당히 큰 상처였고 한동안 일할 동기를 잃어버렸다.

마케팅이라는 직무에 대한 회의감이 들 정도였고, 정체성에 대한 방황도 많이 했다.

만약 다시 대학생 때로 돌아간다면, 정말 신사업에서 전문성을 쌓기를 희망한다면 4차 산업 혁명 수업을 찾아들을 시간에 당장 개발 공부를 했을 것 같다.


또한, 기술이 아직 고도화되지 않았을 정도로 시장이 안정화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마케터 입장에서 시장성 없는 환경에서 마케팅 예산을 집행하는 것은 대부분이 비효율적이었다.

안 그래도 블록체인 시장도 작은데, 투자와 에어드랍(암호화폐를 나눠주는 이벤트)에만 관심 있는 유저들을 서비스 유저로 돌리기란 더욱 쉽지 않았고, 진입하더라도 동일 계정을 지닌 어뷰저가 너무 많았다.

광고 집행이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페이스북이 리브라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전에는 페이스북 광고 집행이 불가했다. 이는 구글도 마찬가지였다.

페이스북 광고 집행 규제가 풀린 시점은 놀랍게도 작년 5월이다.

플랫폼 비즈니스에서 유저가 늘지 않고, 진성 유저 비율이 떨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치명적이다.


출처: 지디넷 코리아

                                페이스북, 블록체인 광고 규제 풀었다(지디넷코리아, 2019/05/09)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솔루션을 제공하는 곳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블록체인 서비스를 영위하는 기업들은 대부분이 스타트업인데, 영세 스타트업 고객들은 월 몇백 이상의 솔루션을 구매하기 어렵다.

좋은 품질의 솔루션을 만들어도 이를 구매할 기업들이 없다면 매출을 내기 어렵고 사업을 지속하기 어렵다.

대기업 아니면 신사업을 버틸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기술 고도화가 필요하다는 말은 비개발자 직무 역량을 쌓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마케팅 직무는 예산을 많이 사용해볼수록 경험치가 쌓이는데 이런 산업에서는 예산 집행이 어렵다.

회사 차원에서는 안 그래도 부족한 예산을 마케팅으로 집행하느니 기술 고도화에 집중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품/서비스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마저도 없는 경우에는 예산 집행을 할 수도 없다.

그저 회사와 서비스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리는(= 부풀리는) 업무 혹은 본인을 갈아내는 운영성 업무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블록체인 산업에는 커뮤니티 매니지먼트(CM)이라는 직무가 있다.

일반 코인 투자자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도록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이나 텔레그램방을 24시간 운영하는 직무다.

코인 가격이 내려가면 해당 방은 정말 난리가 나고, CM은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해 그들을 진정시킨다. 말 그대로 감정노동인 셈이다.

서비스가 나오기 전에는 이러한 운영성 업무가 대부분인데, 과연 이러한 일을 하면서 직무 전문성을 쌓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출처: 코인데스크코리아

        외모평가부터 퇴근 없는 채팅방 관리까지, 속앓이하는 커뮤니티매니저 (코인데스크코리아, 2019/02/27) 


그렇다면, BD나 PM 입장에서는 사업을 개발하고, 서비스를 기획하는 것이 쉬운 편일까?

절대 아니다.

정부 규제가 없고, 시장성이 없기 때문이다.

사업을 확장하려고 해도 해당 사업이 정부 규제에 해당할지 알 수 없어서 드라이브를 걸기 어렵고, 서비스를 개발해도 시장성이 없어서 유저가 유입되지 않는다.

그래서 논의를 할 때마다 도돌이표처럼 이야기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이런 방식이다.


A: "우리 ㅇㅇ 사업을 신규로 개발해보면 어떨까요?"

B: "그 사업은 규제에 걸릴수도 있지 않을까요?"

A: "규제 지침이 없어서 걸릴지 어떨지 모르겠는데.. 법무팀에게 물어볼까요?" (법무팀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B: "한참 걸릴텐데.."


A: "우리 ㅇㅇ 서비스를 기획해보면 어떨까요?"

B: "개발 대비 성과가 날까요?"

A: "..."


신사업 참 어렵다 어려워..


사업을 확장하는 모든 부분에 어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비개발자 주니어는 정말로 직무 전문성을 키우기 쉽지 않다.


2) '산업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


특정 산업에 대한 전문성이 쌓이는 것은 맞다.

블록체인이나 AI 분야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고 경험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경험자는 종종 우대를 받는다.

나도 처음에는 우연한 계기로 제주대학교에서 블록체인 강연을 한 이후로 비트코인을 주제로 온라인 강좌 MooC를 찍고,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블록체인 멘토링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정말 전문가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내가 커리어를 잘 밟고 있구나'하는 착각에 빠졌었다.

하지만 산업 경험은 직무 전문성을 절대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위의 채용 공고를 봐보자.

어느 AI 기업의 Growth Hacker 직무이다.

자격사항은 직무 전문성만 쓰여있고, 산업 경험은 우대사항에 있을 뿐이다.

이 공고뿐만 아니라 모든 채용공고의 필수 자격요건에는 직무 전문성이 쓰여있고, 우대 조건에는 산업 경험이 쓰여있다.


당연한 결과다. 회사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직무 전문성 있는 사람을 뽑아서 산업 교육을 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산업 경험이 있는 사람을 뽑아서 직무 교육을 하는 것이 나을까?

당연히 전자다.

산업에 대한 전문성을 쌓기 위해서 시간을 쓰는 것보다 직무에 대한 전문성을 쌓기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넥스트 커리어를 위해 보편적으로 좋다.

직무 전문성을 쌓으면 어떤 산업이든 지원할 수 있고 능력만 된다면 모셔가려고 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본인이 주니어라면 꼭 직무 전문성을 가장 잘 쌓을 수 있는 회사에 지원하기를 권장한다.

산업은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다.



결론


블록체인 산업에서의 지난 2년을 돌아보면 정말 미친 듯이 일을 해왔던 것 같다.

1주일에 1~2번은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회사에서 자면서 공부하고, 또 노력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연봉이나 복지가 훨씬 좋은 대기업 입사를 포기하고 이름 모를 스타트업에 와서, 집에도 안 가고 밤새우면서 일을 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을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신기술에 대한 동경이 정말 정말 강했고 이상적인 것을 꿈꾸던 주니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첫 번째 회사는 자금 문제로 50명 넘던 인원의 절반 이상이 구조조정을 당하면서 하루 만에 인원이 10명 내외로 줄어들었었다.

그리고 두 번째 회사는 서비스가 잘 운영되는듯했지만, 경영진의 서비스 추진 의지와 모회사의 투자 이슈 등으로 갑자기 서비스를 종료하게 되었다.

2년 동안 2번의 구조조정 과정을 겪으면서 상처도 참 많이 입었고, 속상함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하지만 마냥 욕을 할 생각으로 이 글을 적지는 않았다.

이 과정에서 느낀 점이 정말 많았고, 지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길을 다시 잡았다는 것에 만족한다. 

차라리 구조조정 당해서 다행이라고 생각까지 한다.


경험 속에서 느낀 점들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신사업이란 없다. 사업은 사업이다. 

사업의 기본은 돈을 버는 것이고, 기본을 무시한 회사는 살아남을 수 없다. 

'신기술의 세상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버티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표가 있다면 당장 벗어나라.

버틸 생각하지말고, 지금 당장 직무 전문성을 쌓아서 나중에 그 세상이 왔을 때 진입해도 늦지 않다.

당신은 더 좋은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다.


2) 산업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직무 전문성이 중요하다.

직무 전문성을 쌓기 위해 노력하고, 비즈니스의 1 Cycle을 돌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정의는 각자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비즈니스의 1 Cycle이란, '가설 설정 - 기획 - 평가 - 반복'을 의미한다.

어떤 직무에서든 이러한 Cycle을 돌리고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한다.

이 Cycle을 잘 돌릴 수 있을 것 같은 회사를 찾고, 그 경험을 기록해야 한다.

신사업에서 개발자는 이러한 Cycle을 돌려볼 수 있지만, 비개발자에게는 쉽지 않다.


3) 로켓을 잘 타라.

지금 당장 주변을 돌아보면, 어떤 회사가 로켓인지 얼추 알 수 있다.

회사의 매출과 영업이익, 그것이 어렵다면 그 회사 서비스의 유저 수나 투자유치금을 보면 비교할 수 있다.

블록체인 산업의 경우 이 모든 수치가 측정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혹은 뻥튀기가 심했다)

잠깐이라도 그 로켓을 경험하면 당신은 더욱 높은 가치를 지닌 주니어가 될 수 있다.

로켓을 타면서도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더 좋은 로켓을 탈 기회들이 생길 것이다.



주니어는 모든 과정이 혼란스럽다.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어떻게 커리어를 밟아나가야 할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등등 고민이 끝이 없다.

이 글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2년 동안 방황했던 주니어로서 예비 주니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군분투하고 있을 모든 주니어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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