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는 당신들을 믿어.

by 브리

열살 남짓이던 때 우리 집은 친갓집 근처에 살았다. 학교가 끝나면 엄마 아빠 대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러 달려가는 날들도 많았다. 어린 나에게 할머니 할아버지는 늘 넌 대인이 될 거야,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지금도 그 음성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대인. 큰 사람이 될 거라는 말.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자라나는 동안, 성인이 되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계속 그렇게 말씀해주셨다. 비록 그때처럼 바로 곁에 살지는 않아서 전만큼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에도 한창 한자에 재미를 붙였던지라 의미는 알아들었지만 말뜻은 알지 못했다. 점점 머리가 크면서 그 말에 의지하는 날들이 생겨났다. 어떤 시련이 있어도 나는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나는 결국 성공할 거니까. 한편 삶이 뜻대로 안 풀리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죄송스럽게도 그 말을 괜히 탓하는 날들도 많아졌다. 내가 성공해야 한다,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 스스로를 자꾸만 괴롭히는 건 어릴 때부터 나는 성공할 거라는 잘못된 고집을 갖게 된 탓이라고.


그러다 지난 주 오랜만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갔다. 일을 하지 않는 건 둘째치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걸 깨닫고 난 이후 아주 오랜만에 뵈러 간 거였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자랑스러운 손녀딸이었는데, 당연히 잘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장손이었는데 그 어떤 자식보다 못난 모습이 된 것 같아서 뵈러 가기가 망설여졌었다. 대인이 될 거라는 말을 한 번만 더 들으면 죄책감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수능에서 미끄러져 평소 성적보다 낮은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아무리 봐도 그 학교가 최고더라고 말해주던 가족, 원하던 회사 면접에 떨어졌을 때도 분명 내정자가 있든 취업 비리가 있었을 거라며 나를 두둔해주고 깔깔 웃게 해주었던 가족이니까.


그래도 오랜만에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니 기분이 좋아져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짧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인사를 드리는데 이번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무 조바심 내지 말고 부담 갖지 말라고. 항시 즐겁기만 하면 된다고. 당부하듯이, 아주 여러 번.


그 말씀을 듣고 돌아서는데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대사가 떠올랐다. 국가대표 선발전 시합 직전에 잔뜩 긴장해 제 실력이 나오지 않는 희도에게 펜싱부 코치가 이렇게 말한다. 너를 못 믿겠으면 너를 믿는 나를 믿으라고. 그리고 나오는 희도의 나레이션. 나는 아직 나를 못 믿어. 그렇지만 나를 알아봐준 당신을 믿어. 나는 당신들을 믿고 간다.


나는 아직 나를 믿지 못한다. 그렇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로 나를 믿어준 당신들을 믿는다. 나는 아직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아주 오랫동안 나를 사랑해준 당신들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당신들의 믿음과 사랑으로 나는 나아갈 것이다. 오늘과 전혀 다를 것 없을 내일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흔들릴 때마다 귓가에 들리는 변함없는 목소리가, 오래 전부터 나에게 전해진 견고한 마음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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