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초입에 돌아보는 4월의 일기.

by 브리

지난 4월에 적었던 글. 4월부터 여름이 시작될 것이라던 예측을 깨고, 바깥에 나가지 않으면 유죄일 것만 같은 찬란하고 선선한 날들이 계속되던 때였다. 그 와중 유달리 어둡고 차갑던 날에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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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를 핑계로 몇 달이나 가지 못했던 할머니댁에 다녀왔다. 매일매일 조금씩 시를 쓰시다가 시집을 두 권이나 내신 할머니가 그러셨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시가 있잖아, 그게 맞는 말이야. 날씨가 매섭게 춥고 요상스레 비바람이 분다고 하신 말씀이었지만 나한테만큼은 조금 다르게 들렸다. 4월은 정말 찬란하잖아, 완연한 봄이잖아. 그래서 자꾸만 숨고 싶어지고 달아나고 싶어지는 거거든. 내 삶이 이 날씨만큼 찬란하지 못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퇴사한지 1년 4개월 차. 평온하다면 평온한 그저 그런 하루들의 반복. 다시 돈을 벌겠다고 이 회사 저 회사 찾아보고, 새로운 일을 해볼까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나름 공부도 해보면서 뽀시락뽀시락 조금씩 뭐라도 해온 것도 맞고 그 누구도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환경에서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도 맞다. 전혀 보람되지 않은 무의미한 시간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시간을 갖지 않았던 과거의 나를 떠올려보면 완전히 무너져있었기에 특히 더 그렇다.

그렇지만 자꾸만 숨고 싶고 달아나고 싶다. 아무도 나에게 책임을 지워주지 않는데 뭐가 그리 버거울까 싶다가도, 아무도 나에게 책임을 지워주지 않았기에 더 그렇다. 하나부터 열까지 오롯이 혼자서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동함으로써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실이 그렇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의 이 상태가 영영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 그렇다.

모든 것을 다 걸고 열심히 했던 시간이 있었다. 꿈이라고 불리는 막연한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다. 그래서 이뤘다. 적어도 나는 이뤘다고 생각한다. 여튼 그 시간을 알기에 지금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걸 내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들여야 하는 노력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지금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걸 끊임없이 나에게 상기시킨다. 그래서 무언가 끊임없이 해내고는 있지만 스스로를 존중하게 되기에는 부족하다.너는 더 할 수 있다고 자꾸만 스스로에게 말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노력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모든 걸 다 걸고 매달렸는데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노력하고 싶지 않게 만든다. 꿈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내 모든 것들, 내 관계, 자산, 취미, 취향이 내가 꿈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순간 흩어져버리는 걸 목격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결과를, 지금의 내가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기 때문에. 혼란으로. 불안으로. 고립으로.

여전히 나를 예술인으로 여기는 친구가 있다. 이력서를 봐주던 취업 전문가들은 경력사항에 예술이 너무 눈에 띈다고 말한다. 어딜 가서 가만히 앉아 있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지, 나도 그나마 잘 아는 예술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목소리를 높인다. 1년 4개월 전의 나는 더이상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아닌가. 지금도 그럴 마음은 없다. 그렇지만 내가 찾아낸 아르바이트는 커뮤니티 매니저였다. 두산아트센터 에디터로 강연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공고를 찾아서 지원했던. 내가 나의 천직을 계속 부정하고 있는 걸까? 사람들에게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혼란도 불안도 고립도 온전히 나의 것이지만,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유튜브에 불안만 검색해봐도 불안을 잠재우는 법에 대한 영상이 서른 개쯤 나온다. 그렇지만 이걸 겪어내는 스물 아홉의 나는 특별하다. 내 인생에 두번 다시 없을 순간이니까. 지금보다 혼란스러웠던 시기는 있었어도 지금보다 막막했던 때는 또 없었으니까. 앞으로 힘든 일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지금과 같은 이유로 지금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두번 다시 없을 테니까. 어제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고, 집에 와서 컴퓨터에 깔린 게임을 죄다 지웠다. 덕질 굿즈도 죄다 내다버렸다. 결국 내가 먼저 뭐라도 해야 하는 거라면, 무엇으로든 도망치지 않고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마주보는 것부터.

오늘의 4월은 그다지 찬란하지 않다. 산책을 나갈 수 없는 강아지는 슬픈 눈으로 자꾸만 나를 쳐다본다. 괜찮아, 비가 곧 그칠 거야. 내일은 맑을 거야. 어쩌면 그 다음 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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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반쯤 지난 지금, 내가 처한 이 상황을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어렵다. 그렇지만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다시금 모든 걸 걸고 도전해볼 용기가 생겼다. 매일이 괴로움의 연속이지만 이런 매일이 쌓이다 보면 그 괴로움에 대한 내 역치가 높아질 것이라는 마음으로 괴로움을 되풀이해볼 결심도 섰다. (덜 괴로워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노력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나는 아직 재활용 과정 중에 있는 쓰레기(...) 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나에게 감사하게도 이른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고작 한달 반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그저 감사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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