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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Jun 02. 2019

여성을 지워 버린 칸트 철학

칸트 철학은 여성주의적인가 여성주의의 적인가 -2-

남성은 자신을 위해서 취미를 가지고, 부인은 모든 남성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취미의 대상으로 만든다.
-칸트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칸트의 여성관은 그의 개인적 삶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지만, 그의 여러 저서를 통해서 더 면밀하게 검토 가능하다.

칸트의 실용적 관점에서본 인간학 원문(왼쪽)과 번역본(오른쪽)


우선 그의 개인적 삶의 측면에서 살펴보았을 때 칸트는 여성들과 잘 어울렸던 남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칸트는 여러 가지 이유로 독신생활을 했다. 먼저 건강의 문제가 있었다. 칸트는 “나의 가슴은 납작하고 좁아서 심폐 운동을 자유롭지 못하게 했고 이로 인해 나는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소질을 갖고 있었다. 과거에 나는 심지어 삶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을 만큼 병약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칸트는 결혼을 하지 못했다. 정교수가 되고 생활이 안정됨에 따라 칸트는 결혼을 몇 차례 고려했다고 한다. 한번은 “젊고 아름다우며 부드러운” 미망인이었고, 한번은 베스트팔렌에서 온 소녀였으며, 한번은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의 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칸트가 결혼 때 발생할 비용을 계산하며 주저하는 사이에 첫 번째 여인은 자신에게 청혼한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렸고, 두 번째 여인 역시 기다리다 지쳐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 버렸다. 세 번째 여인에게서는 정신적인 유덕함과 지적 흥미를 찾을 수 없어서 결국 결혼을 포기하고 말았다.

17세기 가장 아름다운 여성상(왼쪽) 18세기 가장 아름다운 여성상(오른쪽)


칸트가 자신의 배우자가 될 사람에게서 찾는 모습이 젊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그 시대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여성성의 모습의 한 편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칸트는 자신이 결혼하고자 하는 여성이 정신적 유덕함 또한 갖추고 있기를 원했다. 정신적 유덕함이라는 것이, 지적 능력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결국 칸트는 여성에게 부과되어 있던 의무인 젊음과 아름다움이라는 여성성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으면서, 자신과 대화가 통할만 한 똑똑한, 이성적인 여성을 바란 것이다. 이는 칸트의 여성에 대한 모순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여러 저서들에서 여성들을 남성만큼의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존재로 그림과 동시에, 여성들은 아름다움이 그 본질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정작 본인은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남성적인 특징- 즉 이성적 똑똑함- 을 바란 것이다. 물론 칸트의 입장에서 아내의 똑똑함은 자신(남성) 만큼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여성에게 중요한 학문의 내용은 인간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남성이다. 여성의 철학은 사색하는 데서 성립한다기보다는 느끼는 데서 성립한다.


칸트는 그렇다고 여성에 대한 물리적 혐오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사교모임에서 여러 부인들과 지속적으로 교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생각한 훌륭한 여성이란 현숙하고 요리를 잘 하는 가정주부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여성에게 중요한 학문의 내용은 인간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남성이다. 여성의 철학은 사색하는 데서 성립한다기보다는 느끼는 데서 성립한다.”고 언급하기도 하고, 여성에 대한 자연의 목적은 “종의 보존과 여성에 의한 사회의 교양과 세련화”이며, “남성은 자신을 위해서 취미를 가지고, 부인은 모든 남성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취미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언급 또한 하였다. 이러한 발언들에서 칸트는 여성의 주체성이나 이성적 능력을 인정 하지 않았으며, 여성에게 부과되어 있는 ‘여자는 아름다워야 한다.’와  ‘여자는 남성을 위한 존재이다.’라는 억압적인 여성성을 철학에까지 가져와서 부각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더해 그의 저서들에서 칸트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각을 더 명백하게 드러난다. 칸트의 철학을 살펴보면 그가 많은 경우에 개념들을 이원화해서 설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보편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칸트의 저서 대부분이 이 이원화 되어 있는 두 구조 중에서 거의 항상 전자가 후자에 비해 우월하고,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고, 이성은 감성보다 우월하며, 보편적인 것이 주관적인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칸트 <미(아름다움)와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 표지

칸트의 전비판기 저작인 『미와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 (이하『고찰』)에서 칸트는 여성과 남성을 미와 숭고의 구도로 논의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여성 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 차별적 발언의 원인은 칸트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성별에 따라서 철학적 사유능력, 도덕적 능력 등이 철저하게 다르게 나타난다고 보는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철학적 사유능력의 차이와 관련한 칸트의 구체적인 언급을 살펴보자.            

여성도 남성처럼 상당한 지성을 갖지만 여성의 것은 아름다운 지성이며, 우리들(남성)의 것은 깊은 지성인데, 그것은 숭고와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독자들은 필자가 남성적인 (…) 깊은 명상과 오래 지속된 숙고는 고상하지만 어려운 것이며, 아름다운 천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는 강제되지 않는 매력을 가진 사람[즉, 여성-연구자]에게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수고스러운 배움 내지 고통스러운 숙고는, 비록 어떤 여성이 이러한 일에 크게 성공했을지라도, 여성에게 적합한 장점들을 훼손한다. (수고스러운 배움 내지 고통스러운 숙고에 대한) 여성의 성취는 그 희소성으로 인해 냉담한 칭찬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Mme Dacier처럼 그리스어로 가득 찬 머리를 지니거나 Marquise de Châtelet처럼 역학에 관한 근본적인 논쟁들을 다룬 여성이라면 턱수염도 갖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지성은 보다 섬세한 감정에 밀접하게 관련된 모든 것을 그 대상으로 선택하며, 추상적인 사고나 유용하지만 무미건조한 지식의 분과들은 근면하고 근본적이며 깊은 지성에게 양도한다. 그러므로 여성은 기하학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 여성의 위대한 학문의 내용은 인류라기보다는 남성이라는 인간에 속한 것이다. 여성의 철학은 이성에 근거하지 않고, 감각에 근거한다. 
                                                                                           칸트 <미와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위 인용문에서 칸트가 여성과 남성의 철학적 사유 능력을 미와 숭고의 구도에서 이원화시키고 여성의 능력에 대해 폄하한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여성이 문학, 과학, 수학 등 학문에서 상당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칸트가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름지기 학문 탐구는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보는 대목에서 여성에 대한 시대적 ․ 문화적 편견이 강하게 드러난다. “여성의 철학이 이성에 근거하지 않고, 감각에 근거한다.”는 칸트의 지적은 남성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며, 여성적인 것은 감성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적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남성은 이성적이고 여성은 감성적일까?



칸트는 “인간 없이는 전체의 우주만물이 그저 허접쓰레기에 불과할 것이며, 헛된 것이고 궁극목적이 없을 것이다”라는 계몽의 이념을 천명한다. 즉 이성적 존재일반으로서 인간이 ‘궁극목적’이 되며, 그래서 우주만물 내지는 세계가 바로 이 인간을 통해서 그 어떤 ‘가치’를 얻게 된다. 인간만이 “오직 도덕적 존재로서 궁극목적이 될 수 있다.” 칸트에게 궁극목적이 없는 세계란 상상할 수 없으며, 인간은 주체로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부연하자면, 오직 ‘도덕성’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목적’이 되게 할 수 있으며, 전체 자연 혹은 본성은 바로 이러한 궁극목적 하에 “목적론적으로 배열된다.”


자연은 자신이 가장 관심을 두는 목적인 ‘종의 유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여성보다 남성에게 보다 큰 힘을 부여했으며, 남성의 큰 힘은 여성을 지배하고 통치할 수 있는 힘이자 여성을 “복종시키는”힘이라는 것이다.


Natur, 즉 자연 혹은 본성에 대한 목적론의 관점에서 인간을 (최고의 가치를 지닌 도덕적 존재이자) 궁극목적으로 상정하는 칸트의 철학은 남성과 여성을 이해하는 방식에 이르러서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칸트에 있어 인간에 있어 동등한 성이라는 것은 자연에 따르는 종의 출산과 성장 그리고 특히 자기유지란 자연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자연은 자신이 가장 관심을 두는 목적인 ‘종의 유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여성보다 남성에게 보다 큰 힘을 부여했으며, 남성의 큰 힘은 여성을 지배하고 통치할 수 있는 힘이자 여성을 “복종시키는”힘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남녀의 평등의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자문자답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남성이 부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너의 주인이어야 한다(남성은 명령하는 부분이어야 하고, 여성은 복종하는 부분이어야 한다)’라고 말할 때 기혼자의 평등이 그 자체로 모순이 되는가라는 것인데, 만약 이러한 지배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능력의 자연적 우위성이라면 [...] 그것은 부부의 자연적 평등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간주될 수는 없는 것이다.     칸트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 中


요컨대 가사라는 공통관심사를 실행함에 있어 자연적으로 우월한 남성이 명령하고 여성이 복종하는 것은 ‘자연적 평등’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남녀의 일반적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재현된다. 예컨대 문명화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남녀관계와 문명화된 상태에서의 남녀 관계의 경우이다. 


첫째, 칸트에 따르면 문명화되지 않은 상태 혹은 ‘원시적 자연상태’에서 우월성은 오직 남성 측에서만 존재한다. 이 경우 여성은 ‘가축’과도 같은 존재이다. 즉 “남성은 무기를 손에 쥐고 나아가며, 여성은 남성의 가제도구를 담은 짐을 지고 남성을 따라가는” 가축이 된다. 


둘째, 칸트는 “문화가 진보된” 문명상태에서도 원시적 자연상태와는 다른 방식으로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에 대해 이질적인 방식으로 우월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남성의 우월성은 ‘육체적 능력과 용기’에 있으며, 여성의 우월성은 ‘여성에 기우는 남성의 성향을 가지고 노는(bemeistern) 천부적 재능’에서 우월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여성성이라 불리우는 약함”은 남성성을 자신의 의도에 맞춰 이용하는 수단이며, 여성의 “수다와 감정적인 언변”은 남성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수단이고, 여성의 “눈물”은 남성을 저항못하게 하는 수단으로 이해된다.


자연(Natur)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목적으로 하는 바의 종의 보존에 대한 “공포”를 “여성의 본성(Natur)”에 심어 놓았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에게 자신에 대한 보호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에 속하는 섬세한 감성들, 예컨대 “언어나 표정에서의 얌전함과 언변성”을 통해서 여성이 남성의 지배자가 되도록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자연의 의도’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지혜’가 된다.


여성은 결혼을 통해 자유롭게 되지만, 남성은 이를 통해 자신의 자유를 상실한다


‘자연의 의도’는 가족을 양분법적 논리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연결된다. 칸트에 따르면 가정 내에서 남편은 ‘오성’을 통해 ‘통치’하고, 부인은 (감정적) ‘성향’을 통해서 지배한다. 여기서 오성적 통치자인 남성과 감정적 지배자인 여성은 군주와 신하의 관계로 비유된다. 즉 “최고의 위치에 있는 군주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있지만, 신하는 “자신의 의지”를 군주에게 줄뿐이다. 더 나아가 칸트는 “여성은 결혼을 통해 자유롭게 되지만, 남성은 이를 통해 자신의 자유를 상실한다”는 논리를 폄으로써 여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마무리 짓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위치를 전복시킨 획기적인 작품인 '이갈리아의 딸들' 수동성, 감성적,  연약함 등의 여성성의 이미지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결론적으로, 칸트에게 모든 인간이 도덕적 인격을 가진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인들, 스스로 결정 능력을 갖지 못하는 미성년자들, “자기의 영업에 따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처분에 따라서 자신의 생존(식량과 보호)을 확보하는 모든 사람”의 경우에서처럼 “모든 여성집단”은 “시민적 인격을 결여하고 있고, 그래서 자신의 생존이 말하자면 실체가 없는 부속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른 사람의 의지에의 종속과 불평등은, 인간으로서 하나의 국민을 구성하는 그러한 사람의 자유와 평등에 결코 위배되지 않는다.”


칸트는 물론 미와 숭고의 감정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서도 공존한다는 점을 인정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전반적으로 미의 감정과 친화력이 있으며, 더 나아가 학문적 탐구를 하는 데 있어서 여성의 이성적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은 여전히 문제의 소지가 있다. 또한 칸트가 주장한 것이 결국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과 조화라고 해도, 그가 넘성성과 여성성 두 개의 중요성에 차이를 둔 것은 명백하다. 이성적 판단을 위해서는 감성적인 경향성이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장 중요하고 우월한 것은 이성적 판단이며, 감성적인 것(여성적인 것)은 결국 보조하는 위치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남성과 여성 간의 사고에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된 차이가 있을까? 


칸트가 시도하고자 했던 여성성과 남성성의 구분 및 각 성(gender)의 성격에 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는 굉장히 위험하고 차별적인 행위라는 것을 우리가 반드시 인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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