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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May 20. 2024

그래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장수연,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항상 뭔가를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저지른다, 라고 함은 누가 하지 않았던 일을 시작하자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꾹꾹 찔러서 (주로 내가 재미있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런칭하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나는 윗사람들에게 제법 예쁨 받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는 아주 미움받기 쉬운 타입의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기질이 친구들을 괴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 것은 성인이 되고도 사회에 나간 이후의 이야기이고, 그전에는 그저 뭔가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은 일들을 뜻 맞는 사람들과 추진해서  밀어붙이는 걸 잘하고 좋아했을 뿐이다(진짜다).

(최근의 피해자로는 함께 책장담화를 하고 있는 필화 님을 들 수 있겠다 ㅋㅋ)

그러니까, 다른 말로는 기획이라는 일을 굉장히 좋아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콘텐츠, 그중에서도 방송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드는 사람들이 진솔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밝힌 책이 있다.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 | 저자 장수연 | 출판 터틀넥프레스 | 발매 2023.07.20.



저자의 이름이 낯익었다. 방송에서 보았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영상 콘텐츠를 잘 안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상 콘텐츠를 안 본다면서 그걸 주로 만드는 기획자들을 인터뷰한 책을 읽는다는 게 앞뒤가 안 맞는 소리처럼 읽힐 수도 있지만, 변명하자면 나는 영상매체에 굉장히 쉽게 중독되는 사람이다. 심각할 정도로. 그래서 아예 안 본다는 게 기본 입장이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 걸 아니까 손을 대지 않는다고 보면 맞다(그런데 예외적으로 OTT는 가끔 본다). 그러면 내가 어디에서 장수연 PD의 이름을 보았을까, 고민하다가 금세 기억했다. 오래전에 소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선생님의 팟캐스트에 출연하신 적이 있는 분이라는 걸.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출연진 몇 분이 계신데, 그중의 한 분이 장수연 PD였다. 왠지 아는 사람이 낸 책을 보는 기분으로 흥미롭게 책을 펼쳤다. 게다가 창작자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롭다(플러스, 터틀넥프레스 김보희 편집자에 대한 호감이 좀 있다. 개인적으로 아는 건 전혀 아니고, 김보희 편집자를 굉장히 좋게 이야기하는 출판관계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어서. 출판사와 편집자에 대한 호감은 출판물에 대한 호감으로 쉽게 이어진다).


내가 영혼을 갈아 넣어서 만든 무언가가 세상에 돌 하나 던진 것만큼의 파문도 일으키지 못할 때의 자괴감. 여가 시간에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소비하는 콘텐츠와 제작자로서 만드는 콘텐츠 사이의 괴리가 클 때, -46쪽


여기서 나는 정말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방송 만드는 분들도 이런 생각하시는구나. 나는 우리 업계 분들만 이런 고민하는 줄 알았다.


‘내가 무슨 예술가도 아니고’라고 자조하면서도 예술을 하던 많은 직업인을 떠올린다. 그것은 창작자가 가진 노동자로서의 면모였다. 노동자이기만 한 노동자가 아니라, 예술가이고 싶은 노동자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모두에게는 지금 하는 일에 몰입하고 싶은 마음, 아름답고 완성도 있게 일을 해내고 싶은 마음, 상품보다 작품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그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50쪽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그리하여 그것으로 생업을 삼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늘 ‘시장성’, ‘상품성’과 자신의 ‘미학’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고, 그것이 능숙하지 않은 신인 시절 타협점을 찾지 못해 많은 경우 첫 시도에서 무릎을 꺾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아마도 방송업계에서는 그것을 극복하게끔 해 주는 선배들의 존재가 있어서 다를 거라고 짐작하지만, 1인 창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러기 쉽지 않다.


이나은 작가님이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문장들로,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순간을 황홀하게 만들어주시는 걸 보면서 ‘나 또한 그 시간을 지나왔다’는 감각이라고 할까요. 뭔가 모르게 세포가 활성화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93쪽


이 대목에 이르러 보편적인 감수성을 창작자의 개성으로 재창조하는 것, 그래서 뻔한 이야기지만 새로운 감동으로 전달하는 것이 창작자의 윤리이자 재능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펼치면서 콘텐츠를 만드는 분도 있죠. 그건 운이 좋은 경우이고,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잖아요. 게다가 우린 이게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니까, 아무리 고민이 되어도 계속 만들어내야 하고요. -147쪽


이렇게까지 계속 뼈 때릴 일인가… ㅠ.ㅠ


경험이란 어느 순간에 일어난 객관적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관찰하며 주관적으로 ‘형성’되는 무엇인지도 모른다. 비슷비슷한 연애 이야기, 흔하디 흔한 삶의 에피소드여도 이야기를 펼쳐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아는 맛이 새로운 맛으로 바뀐다. 어쩌면 모든 창작자가 추구하는 게 이런 재미일 수도 있다. 세상에 다시없을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려는 욕심보다, 너도나도 겪어본 그곳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조각을 발견하기를 꿈꾼다. -208쪽


그리하여 나는 계속 반복하던 같은 생각을 한데 버무려 모은 이 단락에 이르러 끼잉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다시 쥐어뜯는다… 모두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음에 위로받으며, 수많은 콘텐츠가 누군가의 시선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져 가는 비극을 맞이할 수밖에 없음에도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될 거야’ 내지는 ‘되게 할 거야’하며 심기일전의, 혹은 배수지진의 마음으로 만들고 또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있음에 묘한 동료의식을 느끼며 책을 내려놓는다.

힘내요,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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