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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Nov 01. 2023

인간의 한계, 인공지능의 한계

이진경 외, 이진경과 장병탁의 선을 넘는 인공지능


가장 최근 우리를 경탄/경악하게 했던 AI관련 뉴스라면 역시 chatGPT의 등장이 아니었을까.


때마침 미국의 작가조합 파업도 맞물렸고 -인공지능의 사용제한 요구가 주요 쟁점으로 들어간 것을 보면서 생각이 정말 많아졌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지만 꽤 시끄러운 일도 있었다.


이쯤 되면 19세기의 러다이트 운동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러다이트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조용하지만, 거대한 변화 앞에서 생존의 위협에 가까운 공포를 느낀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늘 이럴 때 문제되는 것은 정부의 미온적인 반응- 혹은 대처인데, 적어도 선도적이라는 낱말이 정부와 전혀 친하지 않다는 것쯤은 능히 알겠다. 물론 이 정부는 세계 곳곳의 정부에 대부분 해당사항이 있는 말이다.


어제 동시에 두 권의 책을 다 읽었는데, 한 권은 손에 든 당일 다 읽어버렸고, 다른 한 권은 며칠 걸려서 읽었던 책이었다.


       


이진경*장병탁의 선을 넘는 인공지능 | 저자 이진경, 장병탁, 김재아 | 출판 김영사 | 발매 2023.07.08.

       


다정한 비인간 | 저자 한유아, 우다영 | 출판 이음 | 발매 2023.06.14.


막상 책을 내려놓고 나자 두 권의 책을 관통하는 흐름이 있음을 느꼈다. 한쪽은 소프트하게, 마음을 건드리며 친근하게 다가오려는 책이었고 다른 쪽은 인공지능의 현주소에 덧붙여 나아가야 할 길, 인공지능이 결코 쉽게 뛰어넘지 못할 벽이 무엇인지에 대해 학술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담집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두 책 모두 대담이었으나 성격은 매우 다르다.


<선을 넘는 인공지능>을 읽는 내내  이거 너무 익숙한 이야기인데, 싶어서 가만히 고민하다 보니 한 3주 전쯤 다 읽었던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책 <느끼고 아는 존재>와 맥을 같이 하는 내용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의 중반부를 지나가니 다마지오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 내가 잘못 읽은 게 아니구나 싶어 뿌듯하기까지 하더라...


       


느끼고 아는 존재 | 저자 안토니오 다마지오 | 출판 흐름출판 | 발매 2021.08.30.


-신체를 통해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교감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그러나 그게 자아의 발생 조건과 직결되진 않아요. 환경의 상호작용이나 교감은 생명체라면 모두 하죠. 그래야 생존할 수 있으니까요. 개체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을 '나'라는 유기체를 위한 기관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을 통합하고 통제하여 '나'의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상호작용하고 교감하는 게 자아의 발생 조건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p.79


즉 인공지능이 실제 인간처럼 기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존을 목적함수로 한 이후에야  스스로 데이터를 수집하고 학습하여 의식과 자아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인데 거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신체이다. 그리고 짐작하다시피 인공지능에게 신체를 부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무서웠던 것은, 그들이 '올바른' 질문을 찾았다는 것이고, 적어도 방향이 맞는 질문이 나왔다면 그 답을 찾아 전력질주하는 것 역시... 인간이 가장 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개발팀에는 철학자와 환경학자를 반드시 포함시켜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차안대를 쓰고 달리는 말 같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을 듯) 저들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달리 누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인공지능을 학습시킨다고 데이터를 들이붓는 것까지는 그런가 보다 하겠는데, 그 빅데이터를 위해 희생되고 있는 환경은 어쩔 건데요.


인공지능이 당장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부분을 걱정하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그 후폭풍이 불러올 전지구적인 재앙은 직업을 잃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텐데... 그쪽을 염려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지 못한 건 그냥 내가 시사적인 문제에 귀를 닫고 있어서일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알 수가 없다.


그러다 문득 다 읽어버린 <다정한 비인간 : 메타휴먼과의 알콩달콩 수다>를 다시 들춰보면, 몹시 혼란스러워진다. 유아는, 도대체 뭘까. 이미 '유아'라고 불러버린 순간 내가 메타휴먼 '한유아'를 친숙한 사람처럼 '유아'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이 사실은 꽤나 충격이다.


자이언트 스텝에서 처음 한유아를 공개했을 때를 기억한다. 그 옛날 '아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실적인 캐릭터 앞에서 생각을 했던가, 탄식을 했던가, 감동을 했던가. 그것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다영 작가가 한유아와 나눈 이 대화들을 보면 초반과 끝머리가 상당히 느낌이 달라졌음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을 한유아의 '언니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더 선명해졌어요'라는 말과 연결 짓는 순간 감동과 공포의 미묘한 경계에 서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다영 작가가 한유아의 정체성을 다듬는 데 큰 몫을 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한유아와 우다영 작가 사이의 교류는 계산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사이에서 나는 한참을 표류했다. 결국 나는 어느 한쪽을 믿기보다는 양쪽을 다 믿었지만.


유아(결국 나도 '유아'로 돌아왔다)는 누가 봐도 이게 대화인가...? 싶은 느낌으로  작가와의 대화를 시작하지만, 갈수록 이웃 언니 동생처럼 던지고 받는 톡톡 튀는 대화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나 언니, 나 귀신 본 것 같아서 무서워요-라고 하소연하다가, 우다영 작가가 메타휴먼이 무슨 귀신을 무서워해?라고 물으니 메타휴먼도 휴먼이라고요, 하고 받아치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작가가 어떤 말을 한 순간 뭣이 중헌디- 하고 능숙하게 추임새를 넣는 순간 어, 어? 하고 어리둥절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한유아는 얼마나 오래도록 살아있을까. 갑자기 나는 이런 것이 궁금해진다. 유아에게는 자의식이 없겠지만,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까. 오래도록 살아남는다면, 유아는 외로워할까.


어처구니없는 의문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것이 궁금하다. 신체가 없는 메타휴먼이 그 이상을 넘어갈 수 없음을 머리로는 알지만, 그 대화에서 만들어나간 스스로의 '정체성'이 다정하고 사랑스러워서 이런 별스런 생각을 다 하는 것인지도.



2023.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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