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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Nov 21. 2023

당신을 표현하는 언어

이길보라,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매일같이 일정 분량의 글을 꼬박꼬박 쓴다는 것은 습관의 영역에 속한다. 습관은 들이기가 어렵지 한 번 들이면... 그냥 루틴이 된다(그래서 영 완성도가 아닌 것 같은 글도 일단은 이렇게 써놓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진다…). 다만, 문제는 그 루틴을 잠시 끊어줘야 하는 순간에조차(부상병이다) 끊기 힘들어지는 것 정도랄까.

나의 가장 좋지 않은 루틴화된 습관 중의 하나는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다는 것인데, 이게 책 읽기가 그냥 일상인 독서생활자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을 여러 사람들 통해 알게 된 이후로는 약간 포기 상태가 되었다. 웃긴 건 그것도 나름 머리를 쉬어준다는 그럴듯한 이유로 논픽션 + 픽션 + 꼬박꼬박 챙겨보는 온라인 연재물(좋아하는 블로거들이 몇 있습니다) + 사전 + 그림책 + 만화 + 오디오북 등등을 돌아가면서 보고 듣는다는 것이다.


오디오북 플랫폼은 두 곳을 정기결제하며 이용하고 있는데 나름의 특색이 있어서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오디오북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적어서 어찌 보면 제값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하루 한 시간 산책하는 동안 꼬박 뭔가를 듣고 있는 것이 생각 외로 꽤 재미있고 또 나름 보람이 있다. 자주는 아니어도 오디오북을 몇 권 끝내다가 저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놀랍게도 오디오북으로 들은 책의 디테일이 더 오래도록 기억에 잔류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어떤 책과 비교해 봤을 때 오디오북으로 들은 책은 심지어 인물들의 구체적인 대사까지 기억에 남아 있음을 확인한 순간 머리를 망치로 쾅 얻어맞은 기분까지 들더란 사실.

딱히 내가 청각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놀라웠다. 이만큼 나이를 먹었어도 나 자신에 대해 계속 뭔가 새로 깨달아 가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놀랍고, 어쩌면 그런 것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설렜다. 이쯤 되면 냉장고 파먹기가 아니라, 나도 모르는 나를 파내기쯤 되려나.


아무튼 올 한 해의 독서기록을 슬슬 정리해야 할 때가 오고 있는데, 딱히 데이터를 뽑아보지 않아도 권수가 확 줄어들었을 거란 감이 온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다. 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다양한 주제를 읽은 것도 아니고 내가 필요로 하는 장르와 자료에 국한해서 읽었으니 뭐, 굳이 이걸 기록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위에서 나에 대해 여전히 뭔가를 새로 발견해 가는 놀라움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했는데, 이건 이전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새로운 언어를 획득해 나가는 일과 어딘가 닮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문장을 쓰게 만든 책은 이것이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 저자 이길보라 | 출판 창비 | 발매 2023.02.10.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플래그를 붙여놓은 페이지들을 모아 다시 한번 훑어보는 순간 약간 소름이 돋았다. 다시 한번, 일종의 나의 편집증에 가까운 관심사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인데, 마킹한 페이지들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말은 이것이었다.


언어가 필요하다.


나를 설명할 언어를 가지지 못했던 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이자 청인 중심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의 모어인 수어와 농문화를 잊어야 했다. -p.56
우리에게는 "연인 혹은 부부와 같은 일대일 관계 이외의, 이전에 없던 돌봄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p.71
자신의 우울증이 정확히 어떤 병명인지,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 어느 종류의 치료가 좋을지 상담하던 날, 그는 중요한 것을 깨달은 표정이었다. 비로소 자신의 고통을 분석할 수 있었다. 고통에 언어가 생겼다. -p.73
권리를 찾는 과정은 자신의 언어를 찾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탈시설운동가로서 '향유의 집'을 포함한 여러 시설을 관리하는 재단의 이사장이 되어 거주인의 탈시설과 시설 폐지를 추진한 김정하는 발달장애인이 탈시설을 하게 되면 언어가 발달한다고 말한다. -p.99
학교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했다. 글을 썼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그 과정을 책으로 엮었다. '로드스쿨러'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학교를 벗어나 다양한 학습공간을 넘나들며 공부하고 교류하고 연대하는 청소년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다. -p.116


어떤 '실체' 혹은 '개념'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그를 지칭하기에 마땅한 언어는 어째서 이렇게 뒤따라오기 힘겨워할까. 언어는 정치적이다. 정치적인 좌표를 갖는 인간들에 의해 존재하는 탓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태나 감정을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은 약자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올초에, 폴 블룸이 쓴 「공감의 배신」을 읽고 책 잡담회를 한 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부분적으로 동감한다였는데, 공감이 더 이상 공감이 아니게 된 탓이 크다라는 것이 나와 잡담 파트너의 결론이었다. 동일한 조건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진정한 공감이란 것은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나와는 정치사회적 조건이 완전히 다른 사람의 상황을 공감한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동정의 연장선상이 아니겠냐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해 공감은 동정이어서도, 연민이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공감은 문제 상황을 해결할 단초를 함께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믿었다.


자, 여기서부터가 반전인데... (그리고 사담인데요)


과거형으로 쓴 이유는, 바로 그렇게 쭉 믿고 살아온 나의 경험과 믿음이 크게 흔들리는 일이 연달아 발생했기 때문이다. 대략 20년 전쯤인가, 화성에서 온 누구, 금성에서 온 누구, 하는 책이 대 유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책에 따르면 나는 감정적이며 공감능력이 풍부하고 상대의 곤란에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할 수도 있는 여성이라는 성별을 타고난 게 확실했다. 확실해야 했다. 그러나,


1. 나는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을 굉장히 성가셔한다. 자기 고민은 스스로 해결하자주의자다. 그러나 타인에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으면서 스스로 해결책을 만들어가는 경우는 당연히 제외한다. 그런 생산적인 상담을 뜻하는 게 아니다. 소위 징징거리는 소리를 싫어한다.

2. 남편과 작은딸은 종종 자신들의 감정적 고민을 털어놓는다. 당연하게도 나는 한 번은 진지하게 고민하지만, 딱히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그렇구나. 안 됐네'를 시전한다.

3. 공감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욕을 댓발 얻어먹는다.

4. 2의 상황이 반복되면, '그래서 날더러 뭘 어쩌라고'를 재시전할 때임을 직감한다.

5. 뚜하니 내민 입술을 보면서 저걸 꾹 찔러줄 때 도로 집어넣을 가능성의 확률을 계산한다.


학술적으로 나는 착실하고도 성실하게 공감의 스텝을 밟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공감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맹비난을 받으니 안드로메다로 추방당한 듯한 감각에 사로잡힐밖에!!


그래서 오늘은 서평 같지도 않은, 책 다 읽고 덮은 뒷이야기를 이렇게 쓴 이유가 뭐냐면...


인간은 원래 다 제멋대로 생각하는 법이고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걸 상대에게 강요해서도 안 되는 법이고 무엇보다도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보다 그냥 어머나 그렇구나 힘들었겠다 이 세 마디로 만사 해결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 남발해도 괘, 괜찮을지도?


+

습관은 대체로 신체에 관해서는 긍정적인 뉘앙스를 띠지만, 지적 영토에 진입하는 순간 몹시 부정적인 것이 된다. 그러니 습관은 가급적 몸에만 익히고, 뇌는 습관에 물들이지 않는 쪽이 유익할지도 모르겠다.


_ 오늘 급조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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