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돌려 까기

어니스트 헤밍웨이 外, 작가는 무엇을 쓰고 무엇을 버리는가

by 담화

http://aladin.kr/p/zSreh


이 책은 일곱 작가가 자신의 업(業)에 대해 쓴 에세이를 모았다. 쓴 사람이 보여야 제대로 된 에세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읽으면서 새삼 절절하게 체감했다. 그것은 순전히 마크 트웨인의 신랄한 어조가 펄펄 살아 날뛰는 글 덕분이었다.


마크 트웨인이 어떤 인물들을 썼던가. 톰 소여. 허클베리 핀. 이름만 들어도 생동감이 넘치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살아있을 것만 같은 인물들이다.

그런 이야기를 써냈던 마크 트웨인이 화를 낸다. 그에게 호의를 품을 수밖에 없는 독자들을 앉혀 놓고 매우 점잖게 말을 꺼내는데 듣고 있으려니 돌려 까기에 다름 아니다.


내내 약간의 하품을 참아가며 넘겼던 인내심이 마크 트웨인이 사뭇 공손하게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를 까는(깐다는 말 말고는 어떤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글을 만나기 위해 내가 굳건하게 버텼구나 싶어서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몇 페이지 안 되는 이 글을 읽는 내내 문자 그대로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가 누구냐. 모를 수 있다. 나도 이 글을 읽기 전에 이 작가의 풀네임을 다 기억하지 못했는데 이젠 죽을 때까지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두가 마크 트웨인의 덕이다.

이 작가의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영화로도 제작된 적 있는 <모히칸 족의 최후>는 누구나 알 것이다. 마크 트웨인은 쿠퍼가 얼마나 작가로서 함량 미달이고 취재(조사)에 게으르며, 심지어 관찰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소설을 막 썼는지를 하나하나 근거를 들어가며 신랄하게 비평(아니 그러니까 사실은 깐다고…)하는데 꼭 내가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본인이 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그러면 선체 길이를 대략 43미터라고 추정해 보자. 배의 “폭은 통상보다 넓었다”. 그러면 대충 5미터로 잡아볼 수 있겠다. 결국 이 거대하기 짝이 없는 배가 선체 길이 3분의 1밖에 안 되는 굽잇길을 구불구불 헤집고 다녔으며, 개울 양쪽으로 각각 60센티미터 여유 공간만 남긴 채 강둑 사이를 스치듯 통과했다는 소리다. 이 기적은 아무리 찬양해도 지나치지 않다. -167쪽


마크 트웨인이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를 비평한다는 말은 사실 정확하지 않다. 비평이라기엔 너무 통쾌하고, 조롱이라기엔 너무 근거가 충실하다.


이렇게 하나하나 그가 저지른 업무태만을 요목조목 지적하고 말미에 이르러 트웨인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가 구사하는 영어는 언어에 저지르는 범죄라고.


세상에. 관에 발로 차 밀어 넣은 다음 꼼꼼하게 관 뚜껑을 덮고 못질해 박는 솜씨까지 과연 거장이라 할 만하다. 얼마나 웃었는지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 짧은 에세이를 읽고 나서 했던 생각은 이랬다. 물론 형편없는 문장력도 그로서는 용서하기 힘들었던 것 같지만, 마크 트웨인을 진실로 분노하게 했던 건 어설픈 취재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묘사에, 조금도 현실적이지 않았던 납작한 세계관과 인물들로 독자를 (감히) 미혹해 보려 했던 (=다시 말해 그 모든 과정을 철저히 지키며 어느 면으로도 부족함 없는 글을 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퍼부었던 동료 작가들을 동류로 만들어버리는) 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뭐랄까, 쿠퍼에게도 분명한 장점은 있지 않았나, 하며 소심하게 그의 편을 조금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다. 그가 작가로서 당연히 프로페셔널하게 임했어야 마땅한 그런 지점에서는 분명 2프로… 아니 20프로 부족한 작가인 점은 확실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데는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T 선생님, 선생님이 그가 독자를 능멸한다고 분개하셨지 않나요. 그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상회하는 서사적인 매력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쿠퍼의 작품도 지금껏 살아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선생님 생각처럼, 독자는 바보가 아니어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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