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윌슨, 제인 오스틴을 처방해드립니다
내가 만약 예순이 넘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몸에 찾아온 이상 증세를 느꼈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 질까. 혹은 하고 싶지 않아 질까. 이 질문이 먼저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것 같다. 아무 문제 없이 흘러가던 일상이 느닷없이 홱 꺾어버렸을 때, 뭐가 달라졌는지 스스로도 명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젠 더 이상은 이렇게는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됐을 때.
남편은 정신이 얼떨떨했을 것이다. 도저히 그 사람에게 내가 느끼는 감정의 격렬함이랄지, 주기적으로 파도가 되어 밀려들던 좌절감과 회한이랄지, 남자들이 여자의 히스테리라고 쉽게 일축해 버리는 강렬한 감정 같은 것들을 이해시킬 방법이 없었다. 아무도 내 결정에 토를 달지 않으면 좋겠고 특히나 내 일신상의 문제에 관해서라면 가끔이라도 내가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했다. -18쪽
남들은 쉽게 ‘노후’(요즘은 그 연령대가 좀 올라간 것 같긴 하지만)라고 딱지 붙이는 나이에, 스스로가 삶의 나침반이 되기 위한 프로젝트를 계획한 루스 할머니(딱 한 번만 이렇게 부르겠다)는 좀 멋있다. 많이 멋있다.
제법 나이를 먹은 사람이 소위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그래도 꽤 많아졌지만, 그가 꿈을 이루고 마침내 목표를 달성하는 일을 보는 건 흔치 않다. 희귀하다고 해도 좋겠다. 그만큼 독자에게 주는 울림도 큰 것도 당연하고.
루스는 일흔이 넘어 시골집에서 혼자 살기 시작한다. 가족들에게 할 만큼 했다고 선언하고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기로 한다.
그가 그 시간을 선물한 대상은 다름 아닌 제인 오스틴이다. 근사하지 않은가. 은퇴(가정주부의 삶에서의 은퇴도 은퇴니까) 후의 삶을 간결하게, 혹은 규모 있게, 또는 단순하게 정리하는 이야기는 종종 보았지만 이렇게 야심만만하고 낭만적인 노후의 삶은 잘 보지 못했다. 제인 오스틴 다시 읽기라니. 실로 굉장하다. 박력 넘치는 프로젝트이고 절로 부러워지는 삶이다.
루스가 제인 오스틴을 다시 읽기로 마음먹은 건 그렇게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적어도 시작은 분명히 그러했다. 스스로도 이것이 “더없이 완벽한 휴식”이 될 것이라 예상했으니. 그러나 그가 고백하듯,
나한테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그런 책이었다. 오스틴의 소설이 내 인생을 변화시켰다. (…) 오스틴 소설은 향후 내가 도서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었다. 재미있게 읽은 어떤 소설도 그만큼 중요하진 않았다.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둘케 에트 우틸레’라 칭했던, 달콤함과 유용함을 모두 지닌 책이었다. -30쪽
나이 일흔에 시작한 오스틴 다시 읽기가 나를 위로하다 못해 나를 인생의 화양연화로 이끌 줄이야. -22쪽
그 프로젝트는 놀라운 결실을 맺는다. 무려 88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기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러니 다시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진실로 좋아하는 일은 우리를 어딘가 놀라운 곳에 데려다줄 거라고. 분명히 그런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나는 루스가 저 문장을 어떤 뜻으로 썼는지 안다. 나 역시도 가장 우울하고 삶의 바닥에 부딪쳤다고 느꼈던 순간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쓰기 시작했던 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지금 나의 일상을 꽉 채우고 있으니까.
그저 잘 읽히는 대중소설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이 멋진 작품들이, 얼마나 정교한 테크닉과 구조물을 감추고 있는지를 읽고 배우는 것 역시 근사하지만 내게 이 에세이가 가장 크게 와닿았던 지점은 역시 루스가 (좋게 말해 ‘늦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스스로가 사랑했던 일을 최선을 다해 끝까지 밀어붙여 이루어낸 성과다.
이런 것이 유난히 마음에 들어와 박히는 걸 보면 역시 나는 성과제일주의자인가 싶어서 약간의 회의감도 들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남 눈치 볼 거 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매진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격려가 될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