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구체성이란

최지은, 우리의 여름에게

by 담화
좋아하는 사람을 사람을 만나면 밥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한 끼 식사를 위해 집을 치우고 장을 보고 그릇을 닦으며, 몸에 좋고 마음에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간은 새벽 2시 13분. 밥을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고. 밥을 해주고 싶은 마음에 대해 시를 써야겠다고 혼자 생각합니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냐고요?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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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장으로 책을 여는 작가(시인)가 쓴 책은 다정한 미소로 독자를 부른다. 시종일관 온기가 넘치는 따뜻한 어조로 말을 건네는 시인의 글을 따라가다 보니 십 대 시절의 고민 하나가 불현듯 떠오른다. 지금이야 세월 덕에 적당히 무던해진 성격이 한창 예민하던 시절엔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우습게도 둥글고 원만하게 생긴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까탈스러운 성미는 가까이 다가오던 친구들마저 등을 돌리고 멀어져 가게 만들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마음이 반, 내가 뭘 잘못했을까 어설픈 자아성찰을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 시인처럼 어떤 것도 둥글게 감싸안는 사람, 내게 다가오는 것들의 손을 마주 잡아 줄 줄 아는 사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쓰럽게 여길 상황에서도 좋은 것을 발견하고야 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모두가 좋아한다. 그러나 아무나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시인은 익명의 누군가가 무심하게 불행이라고 딱지를 붙일 수도 있었을 시간을 따스하게 추억한다. 그의 지난 시간 속에 사랑이 촘촘하게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치사랑은 내리사랑만 못하다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때때로 부모의 사랑보다 더 인내심 있고 아무리 퍼내도 무한히 고이곤 했던 아이들의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 겪어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말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엔 손녀가 좋아하는 오이지를 먹이려다 큰 화상을 입었던 할머니가 있다. 그 할머니가 자신의 글자 읽는 모습을 기뻐해서 할머니를 기쁘게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더더욱 글자를 열심히 읽도록 연습했던 다섯 살의 사랑이 있다. 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어른의 배려를 흉내 냈던 아홉 살의 사랑이 있다. 닳고 닳은 사랑의 이름과 소박한 실천들이, 이 책에서는 바로 떠오르지 않는 장미 꽃잎의 매끄럽고 촉촉한 질감처럼 생경하게 피어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 내 마음은 조금 다르다. 서점에 대한 첫 기억, 좋은 책은 스스로 찾으라던 아빠의 목소리, 사람들이 험담하는 책도 직접 읽어보고 스스로 생각하라는 가르침, 어린 날의 인형놀이나 할머니 옆에 앉아 멸치 똥을 따던 한 시절의 모든 기억이 아릿할 만큼 기쁘고 아름답다.
지워버리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기억 옆에, 환한 기억을 덧대어보는 것은 꽤 근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완성'에 이를 수는 없겠지만 하나씩 덧붙여지는 나만의 순서와 과정을 더듬어 본다. -75쪽


이렇게 말하는 시인은 곧, 외롭고 쓸쓸했던 곳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그 누군가의 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혼자인 손이 따뜻해지는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삶을 완성하는 법 같은 게 세상에 있을 리도 없지만, 아픈 기억 옆에 좋은 기억을 나란히 놓아두자는 시인의 말은 조용히 우리를 설득한다. 이렇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말과 글을 남기는 사람이기에, 어떤 사람은


지은 시인님에게는 주변을 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힘은 결국 시인님을 지켜주지 않을까, 아늑과 다감 속에 머무를 수 있도록. -87쪽


이렇게 말해주는 것일 테고.


이렇듯 강인하게 사랑을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요즘처럼 너무나 쉽게 혐오와 차별의 말을 내뱉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는 일이 잦은 때는 더욱더. 그럼에도 이렇게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들을 주섬주섬 꺼내어 보여주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은 조금씩 정화되고 있다고 안심하게 된다.


할머니의 노란 달걀찜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없지만 '있었던' 순간만으로도 젖은 것이 마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179쪽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인생이 젖었던 순간을 말릴 수 있는 선명한 사랑의 찰나들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났으면 좋겠다. 그거면 괜찮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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