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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Dec 14. 2023

세상 단 한 곳만 그런 장소가 있어도

델리아 오언스, 가재가 노래하는 곳

그리츠grits.     

이것은 일종의 옥수수죽이다. 


내게는 이 음식이 강렬하게 환기하는 시대가 있다. 노예제가 본격적으로 도덕적 이슈가 되기 전의, 아주 대략적으로 짚으면 1800년대 중반쯤 될까. 물론 이것은 문학 작품들을 통해 내 인식 체계 내의 시대 문화 타임라인에 자리 잡은 것이므로, 실제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시대적 상징성과는 별개로, 내게는 그리츠는 1960년대의 노스캐롤라이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식이 될 것 같다. 어떤 소설들은 특정한 음식을 아주 강하게 품고 있어서, 해당되는 이야기를 살고 난 이후에는 그 음식은 그저 그 이야기 자체가 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이를테면 프루스트의 마들렌 같은 것. 


추측컨대 이 책을 읽은 사람은 그리츠 이상 가는 외롭고 슬픈 음식은 떠올릴 수 없을 것만 같다. 홀로 남은 어린 여자아이가 살아남기 위해 옥수수 가루를 물에 개어 먹을 만한 음식이 되도록 휘젓고 있었을 그 고독한 장면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매일같이 술에 절어서,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옆에서 견디다 못해 아이들을 뒤에 버려두고서라도 생존본능을 좇을 수밖에 없었던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가 엄마가 만들어 주던 옥수수죽을 만드는 법을 생각하면서 주걱을 휘젓는 장면은 굳이 영상으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슬프고 먹먹하다.      



요즘은 워낙 자기의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서 작법서 대 흥행시대라고 봐도 될 정도인데, 작법서를 좀 읽다 보면 어떤 책에서든 항상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나 키워드가 있다. 달리 말해 그것이 스토리텔링의 핵심이자 요체라는 의미일 텐데, 그중에서 가장 공감이 가면서도 순순히 따르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이거다. 당신의 주인공을 괴롭혀라. 아주 죽도록, 괴로워서 절망하도록 괴롭혀라. 델리아 오언스는 아주 교과서적으로 이 중요한(BUT 따르고 싶지 않아지는) 팁을 충실히 따른다.      


우리의 가엾은 주인공 카야는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손위 형제들에게, 그리고 가장 가까이 지내던 바로 위 오빠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차례로 버림받는다. 그나마 카야의 삶에 잠시 봄볕처럼 찾아들었던 유일한 온기이자 희망이었던 테이트 역시 자신의 꿈을 위해 결국 카야를 떠난다. 그나마 카야에게 믿고 기댈 수 있던 안식처 같은 이들은 백인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배척당하는 흑인 부부다. 약자가 약자를 보호하고 돌보는 이 우습지도 않은,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실 반영적 모티브란. 


결핍을 아는 자가 타인의 결핍을 읽고 보듬는다. 적어도 문학이 말해주는 바, 세상은 여전히 그렇다.      


시대의 전형처럼 여겨지는 삶을 누릴 행운을 갖지 못했던 카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자신의 최선으로 삶을 꾸렸고, 그저 그것이 좁은 사회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이유로 모질게 배척당한다. 유년기의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타인에게 인정받는 경험이 전무했기에 카야에게는 심각한 결핍이 발생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소속감, 애정에 대한 욕구가 채워진 적이 없었기에 이를 미끼처럼 흔들어대는 잔학함에 저항할 힘이 없다. 끝끝내 본인의 탓이 아닌 결여를 약점으로 잡고 위협하고 흔들어대는 천박한 악 앞에서 카야가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카야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의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이미 많은 작가가 독자를 향해 던져 온 질문이고 유사한 주제 역시 많이 다루어져 왔으나 이 책의 미덕은 역시 작가의 직업적 전문성이 엮어낸 살아있는 세계에 있다. 성실한 취재로 많은 부분이 성취 가능하다고는 하나, 델리아 오언스가 써낸 습지를 그려낸 문장들은 그 자체로 온전히 살아 숨 쉬는 세계다.      


이 책을 추천했던 YJ CHO님께 무한한 감사를.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 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 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 p.13     
그렇게 누워서 엄마는 말했다. “다들 엄마 말 잘 들어. 이건 진짜 인생에 있어 중요한 교훈이야. 그래, 우리 배는 좌초돼서 꼼짝도 못 했어. 하지만 우리 여자들이 어떻게 했지? 재밋거리로 만들었잖아. 깔깔 웃으면서 좋아했잖아. 자매랑 여자 친구들은 그래서 좋은 거야, 특히나 진창에서는 같이 구르는 거야.” - p.122     
카야는 테이트에게 더 가까이 다가앉았지만, 손이 닿을 만큼 가까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느낌이 카야를 훑었다. 어쩐지 두 사람의 어깨 사이 공간이 변한 것 같았다. 테이트도 느꼈을까. 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어깨가 살짝 스칠 정도까지만. 닿을 때까지만. 혹시 테이트가 눈치챌까. 바로 그때 한 줄기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쳐 수천 장의 노란 시카모어 낙엽이 생명줄을 놓치고 온 하늘에 흐드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을의 낙엽은 추락하지 않는다. 비상한다. 시간을 타고 정처 없이 헤맨다. 잎사귀가 날아오를 단 한 번의 기회다. 낙엽은 빛을 반사하며 돌풍을 타고 소용돌이치고 미끄러지고 파닥거렸다. - p.155     
여기에는 윤리적 심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악의 희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른 참가자들의 목숨을 희생시켜 그 대가로 힘차게 지속되는 생명이 있을 뿐이다. 생물학에서 옳고 그름이란, 같은 색채를 다른 불빛에 비추어보는 일이다. - p.179     
우주의 다른 모든 사물처럼 우리도 질량이 더 높은 쪽으로 굴러가기 마련이지. - p.232          

2023.12.14 당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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