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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Dec 20. 2023

우리는 모두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프레드릭 배크만, 우리와 당신들

원본_ 2020-03-20 15:03

https://blog.aladin.co.kr/sweetpip/11587966



우리와 당신들 | 저자 프레드릭 배크만 | 출판 다산책방 | 발매 2019.01.28.


한 해동안 읽은 책들을 모아놓고 대강의 결산 비슷한 것은 하지만 올해 최고의 책, 과 같은 부담스러운(그리고 책임을 져야 할 것만 같은 무게 있는) 타이틀을 붙여놓고 한두 권을 고르는 일은 안 했습니다. 말 그대로 부담스럽고 무서우니까요. 물론 가까운 친구들이 주로 둘러보고 가지만서도 누군가가 우연히 '이 책이 올해 읽은 최고의 책이었다'라고 쓴 글을 보고, 아니 뭐 그런 책을 좋다고 추천해요?라고 묻는다면 극소심(그리고 속으로는 가시를 세우는)한 저는 아 그런가요... 하고 말꼬리를 흐릴 것만 같거든요. 그런데 이제 겨우 3월 중순을 보낸 이 시점에서, 남은 몇 달 동안 책을 더 이상 안 읽을 것도 아닌데 이 책은 정말 최고였어라고 몇 번이고 되뇌게 하는 소설을 만났고 이 책에 대해서 몇 줄이라도 떠들지 않으면 입이 간지러워서 어떻게 될 것 같은 기분에 꽉 짓눌렸단 말이지요. 


읽고 싶은 책을 내가 직접 고르는 경우가 더 많지만 책이 나를 찾아오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그다지 없는 순간에도 '자율성'을 발휘하고 싶어 하는 게 인간 본성이어서일까요, 예고된 도서관 휴관을 앞두고 좀 허전해진 한국책 서가를 맴돌다 눈에 익은 작가 이름을 발견했어요. 이 작가의 전작 중에서는 두 권을 읽어 보았고요. <오베라는 남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입니다. 이야기로서의 매력은 <오베...>가, 캐릭터의 생동감은<할머니가...>가 훨씬 좋았습니다. 즉 두 가지를 모두 겸비한 느낌은 아니었다는 뜻이에요. 개인적인 판단으로서는. 


공통적으로 모아지는 특징이라면 이런 거였습니다. 굉장히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을 오밀조밀 뜯어보는, 그래서 뭐든 꿰뚫어 보고 있는 노인 같은 작가다...라는 것. 어느 한 면만을 보고 속단하기에 사람은 너무 많은 얼굴을 갖고 산다는 거, 당신들이 잊고 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일들은 둘 이상의 각도에서 바라보고 생각해봐야 한다고, 손을 뻗어 미처 보지 못한 어떤 부분을 가리켜 보여주는 예리한 감성의 소유자일 것 같다... 라는 것.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고 어떤 교육과 독서와 여타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너그러운 시선으로 사람들을 감싸안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됐을까. 어떻게 해서 이렇게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결점투성이고 치명적인 과오를 저지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인물들을 창조해 냈을까. 인간으로서는 바닥인 것 같은데도 그 사람 마음 바닥 어딘가에는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보듬고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아주 쉽게 선택하는 비윤리가 어째서 옳지 않은지, 그것이 어떻게 의도된 무심함 속에서 타인을 목 조르는 올가미가 될 수 있는지를 이토록 선명하고 인간미 넘치게 호소할 수 있을까. 


세상의 많고 많은 험악하고 질 나쁜 사건들의 피해자가 어떻게 삶을 힘겹게 이어나가고 있는지, 그들에게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들이 무엇인지 이렇게나 남의 일 같지 않게 마음 불편하게 하면서, 모든 진실을 뾰족하게 다듬어 찔러 넣어 아프게 하는 이야기가 또 있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절대 즐겁지 않습니다. 굉장히 괴롭고 아파요. 그렇지만 그 아픔은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고통이기 때문에, 저는 진심으로 이 책이 더 많은 독자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이 소설은 폭력의 피해자가 실제 당했던 그 폭력보다, 생각 없는 2차 폭력들이 양산되는 시간 속에 피해 당사자를 포함해 그 가족까지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과정을 훈계조도 설득조도 아닌 건조한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정말 무덤덤해요. 그러니까 그 감정은 고스란히 독자가 느껴야만 합니다. 쉽게 손가락질하고 쉽게 말을 옮겨 상처를 곪게 하는 무심함이 바이러스와 다를 게 뭔가 생각하게 하죠.


단순히 어떤 폭력사건에 대해서만 서술하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독자를 이야기의 배경인 베어타운 안으로 깊숙이 끌고 가는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요. 그 밖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곁을 지키며 이 두꺼운 소설을 든든하게 떠받칩니다. 


피해자임에도 옹호받지 못하는 강간 피해자 소녀가 끝없이 자신을 책망할 때 독자는 다시 한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혐오스럽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책을 덮을 때 우리는 알게 되죠. 작가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이, 촉구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자신의 일로서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번번이 남편의 직업적 소망에 짓눌려 자신을 희생하는 아내의 이야기는 속을 답답하게 합니다. 한때 가까웠지만 마음의 거리는 갈수록 벌어지는 부부사이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철렁해져요. 너무 현실적이어서요. 


끌리는 이성에게 거절당하고 그의 가장 숨기고 싶은 비밀을 폭로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는 만감이 교차해요. 잘못인걸 알지만 우리도 그렇게 순간의 분노와 좌절에 휩싸여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던 순간이 있었으니까요. 주부 노릇이 아무리 잘해봐야 본전이라는 말까지, 작가는 속 시원하게 해 줍니다. 어떻게 이런 작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이야기가 흘러가는 순간순간마다 작가와 소설 속 인물들과 이야기의 방향과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의문이 쉴 새 없이 싹틉니다. 계속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최근에 내가 읽었던 그 어떤 책들 중에서도 이렇게 넘치는 질문을 끌어올린 책이 있었던가 하고요. 계속 질문하게 하는 책은 좋은 책입니다. 많은 독서가들이 말하고 있듯이요. 물론 모든 독자가 같은 질문을 하란 법은 없겠지만요. 묻게 만들고 답하기 위해 생각하게 하고. 역시 책은 그래서 읽는 것인가 봅니다.


이곳에서 아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저지르는 끔찍한 잘못은 대부분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날수록 실수는 더 커지고 결과는 더 끔찍해지며 자존심에 더 엄청난 금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31쪽
"애들 꼬맹이 시절이 기억나요, 파티마? 유치원으로 찾아가면 애들이 달려와서 말 그대로 내 품속으로 뛰어들잖아요. 내가 받아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온몸을 맡기잖아요. 나는 그 순간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파티마는 웃으며 말했다. "아맛이 하키를 하고 있으면, 행복해하면 나도 똑같이 느껴져요. 어떤 건지 알죠?" 안-카트린은 알고도 남는다. 그래서 두 사람은 친구가 됐다. -117쪽
부모 간의 애정이 식으면 아이들은 아주 미묘한 것을 통해, 심지어 '너희'라는 아주 사소한 단어를 통해 알아차린다. 마야는 요즘 매일 아침마다 그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그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인 척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예전에 그녀의 부모님은 서로를 그냥 '엄마'와 '아빠'라고 불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딸, 엄마가 진심으로 너를 천일 동안 외출 금지시키겠다는 건 아니야." "딸, 네가 만든 눈사람을 아빠가 일부러 무너뜨린 거 아니야. 발에 걸려서 넘어진 거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한쪽이 거의 아무렇지 않게 "네가 집에 없으면 너희 엄마가 엄청 걱정하는데, 전화를 해주면 안 되겠니?"라고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너희 아빠랑 나는 너를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걸 잊지 마"라고 보낸다. 결혼 생활이 파탄 났음을 알리는 한 단어. 그게 바로 '너희'다. 둘은 이제 서로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건가.  -137쪽
엄마 노릇은 집의 토대를 굳히거나 지붕을 고치는 것과 같다.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야 하고 완벽하게 끝내도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 아무도 칭찬을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한 시간 동안 야근을 하는 것은 예쁜 그림을 걸거나 전등을 바꾸는 것과 같다. 모두가 알아봐 준다.  -299쪽
우리는 항상 공격한 쪽의 감정을 변호한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쪽이 그들이라도 되는 듯이.  -398쪽
다들 이건 한 사람에게 벌어진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럴 리 없다. 속으로는 우리도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것을. 우리의 잘못이라는 것을. -414쪽
그 별채 안에서 마야의 상처가 치유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타임머신을 만들지도 않고 과거를 바꾸지도 않고 기억상실이라는 축복을 누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날마다 여길 찾아와 무술을 배울 테고 조만간 슈퍼마켓에서 줄을 서 있을 때 공교롭게도 모르는 사람이 그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갈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움찔하지 않을 것이다. 소소한 사건들 중에 가장 큰 사건이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날 그녀는 슈퍼마켓이 아닌 다른 곳에 다녀오는 듯이 집까지 걸어갈 것이다. 그러고는 그날 저녁에 연습하러 여길 다시 찾을 것이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431쪽
"개자식들 앞에서 울지 마요, 벤이 선배."

벤이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휘둥그레 뜬다.

"참지를 못하겠는데...... 너는 무슨 수로 감당하니?"

마야의 목소리는 하는 얘기에 비해 힘이 없다.

"그냥 들어가요.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고 나쁜 놈이 쳐다보면 그쪽에서 고개를 돌릴 때까지 눈을 똑바로 쳐다봐요.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벤이는 그의 안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묻는다.

"무슨 수로 견뎠니? 지난 봄에...... 그런 일이 있었을 때......무슨 수로 버텼니?"

그녀의 눈빛은 냉정하고 목소리는 딱 부러진다.

"나는 피해자가 아니에요. 나는 생존자예요." 

그녀는 학교를 향해 걸어간다. 벤이는 영원의 시간 동안 망설이다 그녀를 따라간다. 그녀가 그를 기다린다. 그의 옆에서 걷는다. 그들의 걸음은 느리고 어쩌면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들은 살금살금 그 복도로 들어서지 않는다. 폭풍처럼 진격한다. -522~523쪽


2023년 12월 20일, 현재 역시까지도 몹시 사랑하는 책. 이 책을 만날 수 있게 해 준, Foster City Library의 한국 도서 담당자님께 새삼스러운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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