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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Jan 15.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좋아서

정세랑 외, 하필 책이 좋아서

이러다간 정말 집이 무너질 것 같아서, 눈물을 머금고 두 번 보지는 않을 것 같은- 혹은 레퍼런스로도 보게 되지 않을 것 같은 책은 빨리빨리 처분하려고 생각한 이후 실천하려고 하는 세부항목들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완독 후에는, 가능한 한 빠르게 리뷰를 쓰기. 얼마나 허접하건 혼자 아무렇게나 지껄이건 말건, 일단은 나라는 필터를 한 번 거치게 만들면 그 책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선명해진다.

누군가가 나와의 인연을 끊어내고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 해도 그와 얽힌 기억은 여간해서는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얼기설기 요약을 하건 마음에 들었던 몇 문장을 옮겨 적건, 어떤 ‘상호작용’의 기억을 만든 책은 어떻게든 나와의 연약한 연결을 유지하게 된다. 그것이 감히 리뷰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몇 줄의 글을 적게 하는 동력이 된다. 지금껏 읽어왔고 사랑해 왔던 책들을 죽는 날까지 안고 가지는 못할진대(잠깐 그러면 어떨까 생각해 봤는데, 남는 가족들에게 민폐도 이만저만한 민폐가 아니다. 갑자기 책을 빨리빨리 정리해야겠다는 굉장한 의욕이 샘솟았다) 적당히 아껴줄 수 있는 것만 남기고 또 새로 갈 곳을 정해주는 것도 애서가로서의 도리가 되겠다.


지난주에 읽은 책- 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책담에서도 쓰고 있는 테마이긴 하지만 선택받지 못한 남은 책들에 대한 미안함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기껏 손에 들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긴, 흔치 않은 연을 맺었음에도 끝끝내 어디서도 이야기하지 못한 책들에 대한 아쉬움은 늘 존재한다. 다른 훌륭한 독자들께서 바라건대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풀어놓아 주시기를.


아무튼…


그래서, 얼마 전에 읽은 책 중 하나. 하필 책이 좋아서.


하필 책이 좋아서 | 저자 김동신, 신연선, 정세랑 | 출판 북노마드 | 발매2024.01.11.


제목이 참 좋다. 그러게나 말이다. 하필 책이 좋아서- 이 말 뒤에 숨은 한숨과 어쩐지 허탈한 웃음과 그럼에도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격려가 보인다면, 예, 반갑습니다. 동지시네요. 어쩌면 이 책을 함께 쓴 저자들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세 분의 저자 중 두 분은 내게 아주 친숙하게 느껴지는 분인데, 한 분은 나의 최애 작가이신 정세랑 작가님이고, 다른 한 분은 음성으로, 그리고 그간의 방송에서 느꼈던 상냥함과 배려심으로 참 좋은 사람이겠다, 싶었던 신연선 작가님이다. 남은 한 분은 디자이너이시다. 이 세 분이 책에 대해서 각자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정세랑 작가님은 아무래도 편집자와 작가라는 신분(?)을 다 겪어본 입장에서 출판계에서 겪었던 크고 작은 일들, 작가로서 부닥칠 수밖에 없는 해프닝과 불합리함들을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8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하셨던 시인 선생님과 우연히 저녁을 같이 한 적 있다. 선생님이 아주 궁금하시다는 듯 물어보셨다.
“요새 원고료가 얼마예요?”
“장당 만 원쯤 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그때 선생님의 당황스러움 가득한 ‘아직도…..?’가 자주 머릿속에서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66쪽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인데, 한 출판사에서 특정 퍼센트 이상 할인하는 책에 한해서는 인세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넣은 다음, 몇 천 부를 모조리 염가에 판 후 저자에게 인세를 1원도 지불하지 않으며 정당한 운영 방식이라고 큰소리를 친 적이 있었다. 크고 유명한 출판사였다. -73쪽


이 크고 유명한 출판사가 어딘지 정말 알고 싶다. 정말. 그래서, 이렇게 날강도 같은 짓으로 그 네임 밸류를 얻으셔서 자랑스럽냐고 묻고 싶다. 그래, 우리는 모르겠지. 당해 본 작가가 아니고서는 모르겠지만, 본인은 알 것이다. 두고두고 자랑스레 여기겠지.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겠지. 그러나 당신에게 붙일 수 있는 말, 치부恥部조차 타인의 지적 노동을 갈취한 당신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어야만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제안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지나치게 에두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 아닌가. 분명히 출판계의 어떤 누군가는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여기서 한때 팟캐스트계를 평정했던 채사장님의 한 저서에 붙어있는 태그라인을 상기하고 가도록 하자.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바로 그거다. 불편한 것을 외면하면 결단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심지어 상대의 기분을 고려해서 이토록 부드럽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결이 비슷한 문제를 예전부터 제기한 다른 작가님의 글도 읽은 적이 있는데, 그에 비하면 ‘제 생각은 이러이러한데, 한 번쯤 생각해 봐 주 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도의 이 문장에도 불편함을 느끼는 출판사가 있다면 그건 좀… 예, 저라면 뒤돌아서서 줄행랑을 치겠습니다.


신연선 작가님 역시 말랑말랑 포근포근하게 말하기의 달인인데, 이런 현실(!)을 견디면서도 그곳을 굳건히 지키는, 그토록 책을 사랑하고 어떤 의무감까지 느끼는 분들께 왠지 숙연한 감사의 마음이 든다.


거듭 강조하지만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이라고 해도 저마다의 특색이랄까, 다른 어떤 책도 아닌 바로 그 책만이 주는 빛나는 부분이 하나쯤은 분명히 존재한다. 또한 그것을 발견해 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고, 나는 그런 눈 밝은 독자가 그 책을 쓴 사람조차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가능성들을 발견해 책 바깥으로 퍼져 나오게 하는 장면을 몇 번쯤 목격한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책의 놀라운 가능성에, 인간 이해의 무한함에 감동해서 무너진 인류애가 조금 회복되는 경험을 했다. -221쪽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허접한 문장이나마 엮어가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내가 발견한 이 반짝이는 한 권의 책을, 다른 누군가도 함께 발견해 주기를 바라서. 누군가가 또 미처 내가 보지 못했던 어떤 귀중한 통찰 하나를 읽어 주기를 바라서.


마지막으로 김동신 디자이너의 말을 인용한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을 단계로 나눈다면 첫 단계는 차이를 감지하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뭔가 달라 보이는 느낌,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이상함. 어쩌다 눈에 띈 작은 차이는 ‘그것’을 그것 아닌 모든 것들로부터 떠내어 흐릿하던 세상을 대상과 배경으로 선명하게 구분하여 인식하게 만든다. 취향과 사랑 같은 편향적인 감정은 그렇게 차이가 벌린 틈에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109쪽


나와의 차이가 아니다. 세상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같은 ‘종’들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차이를 말함이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고, 무엇인가가 내게 특별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리고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세상에는 여전히 내 마음을 권태기에 빠지지 않고 활발히 움직이는 세계에 STAY TUNED 하게끔 요구하는- 저마다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것이 많고도 많다. 나 역시, ‘하필이면! 책이 좋아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이런 일을 힘겹게 하고 있는 것이고.


-2024.1.15 당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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