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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화 Feb 21. 2024

당신의 장래희망은 무엇인가요

하 정,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김연수 작가가 「시절일기」에서였던가, 장래희망은 할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이런 할머니들이 있어 나는 또다시 장래를 희망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나의 장래희망은, 다시 할머니, 웃는 눈으로 선한 것만 보는 할머니가 됐다. -31쪽     


공교롭다고 할까 신기하다고 할까. 어떤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를 찾아 공기처럼 주변에서 떠도는 형용사를 붙잡으려다 이렇게 두 개가 동시에 손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러면 곰곰 고민하지만, 결국 나는 늘 두 개를 다 적어 넣는 쪽을 택하고 만다. 다른 일에서는 칼날을 밀어 넣듯 손쉽게(쓰고 보니 굉장히 수상쩍게 들리는 말이지만) 하나를 고르는 데 주저함이 없건만 단어만큼은 그렇게 냉정하게 고를 수가 없다. 결론적으로 나는 늘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중립적인 표현을 쓰곤 하지만 해를 거듭하다 보니 그게 또 어느새 나의 성격적 일부분이 되고 말았다.      


여하간 그런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책이 「시절일기」였는데, 무슨 인연인지 그다음으로 읽겠노라 골라든 책 역시 할머니를 표방하고 있었다. 앞선 책과 그다음 책 사이에 놓인 하나의 연결고리는 할머니,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다정하고 포근하고, 무엇보다 품이 넓은 이름이다.      


이른 아침에 부엌 싱크대에 기대앉아 잠을 깨려고 하는 행동 중의 하나가 신간을 훑어보는 일인데, 이 책은 그중에서도 발군으로 눈에 띄었다. 그도 그럴 것이 표지는 정말로 눈에 확 띄는 빨간색이다. 게다가 사진에 감도는 푸르스름한 톤과, 사진을 정확히 양분하는 붉은 조명과(유명한 디자인인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기막히게 어울리는 것이 표지 디자이너의 이름을 궁금하게 한다.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 저자 하정 | 출판 좋은여름 | 발매 2024.01.01.


게다가 제목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라니. 면지를 넘기다 보면 만나는 문구가 연이어 웃음을 터지게 한다. 우린 이미 귀여우니까 시간만 잘 가면 됩니다, 라니. 정말로 귀여운 자신감이다. 납득할 수밖에 없는 합당한 근거도 있다.      


여행 중에 만나게 되는 신기한 인연들은, 나도 몇 번인가 체험한 적이 있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오래도록 깊게, 가족까지 함께 하는 인연은 남의 이야기라도 귀하다. 게다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 할머니뿐만 아니라, 이 가족이 얼마나 예술적이고 사랑스러운지!     


옛 물건이라고 그저 추억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쥴리네 집 안 가득한 옛것들은 단순히 골동품 모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이모의 물건에 쥴리만의 인생을 통해 빚어진 취향이 적극 더해졌다. … 모두가 쥴리의 방식으로 재해석되어 자리잡고 있었다. 아네뜨의 집은 뭐랄까 … ‘원조’를 만나는 곳이었다. 쥴리의 원조인 아네뜨를, 그리고 아네뜨의 원조인 어위를! -78쪽     


이런 유산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줄 아는 누군가에게는 그에게 그것을 물려준 원조가 있고, 그 원조에게는 또 원조의 원조가 있다. 이런 아름다움의 대물림을 이야기에서건, 현실에서건 만날 때는 늘 마음이 들뜬다.      


“맞아. 아버지는 어디 특별한 곳을 갔을 때만 엽서를 보낸 것이 아니란다. 동네에 있는 미술관에 새 전시가 열리면 가서 구경하고는, 박물관이나 갤러리엔 반드시 기념품점이 있잖니? 그곳엔 또 반드시 기념엽서가 있고. 그 엽서를 사서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내곤 했어.” 

… 

기록하기 좋아하는 어위는 아무리 작은 전시라도 관람 후기 남기기를 잊지 않았다. 책을 보았다면 서평을, 영화를 보았다면 감상평을, 물건을 샀으면 구매 후기를 꼭 남겼을 사람이다. 

… 

그는 가장 마음에 드는 엽서를 골라 딸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자신을 남겼고, 딸에게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143쪽     


이런 대목을 만나면 오늘처럼 서늘함과 추움의 경계에서 비가 쏟아지는 날, 집에 돌아와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쥐었을 때 손끝에서부터 따스함이 퍼져 나가는 것처럼 마음에 온기가 번진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딸에게 보낼 줄 아는 아버지란 얼마나 멋진 존재인지.           


우리가 부모와 조부모에게 듣고 본 이야기는 우리 부모에게 어떠한 형태로도 물려지지 않았다. 살기 바빴던 우리 부모의 물건에도 다정한 이야기가 깃들 여유가 없었다. 조부모에게 아끼던 가구가 없었을 리 없다. 삶에 그것들을 데려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을 뿐이다. -178쪽     


삶에 이야기를 데려간다, 라는 이 문장은 묵직하다. 삶의 켜마다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삶이란 얼마나 여유로운가.      


독자들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기뻤을지 눈물을 떨구었을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분명하게 일러준다. 만약 울었다면 당신은 결코 혼자 울지 않았으며,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아~~주 많다고. 무엇을 좋아하든 무엇을 꿈꾸든 상관없는, 모두가 안전한 이 놀이터에서 우리 다 함께 놀자고. -307쪽   


종점이 가까워짐을 느끼면서, 이제 웬만한 감동은 다 받았겠거니 생각한 내게 정말 생각지도 못한 대단원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게 무엇인지는 여기서 밝히지 않겠다. 설마하니 방문객들의 자취를 이런 기념비적인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을 줄이야. 그 선물을 받았을 아네뜨 할머니가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근사하고 예쁘기까지 한 이 책을, 삶이 무료하고 간혹 인간이 싫어지기도 하는 증상이 올락 말락 한 분들께 진심으로 권한다. 인류애가 충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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