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가장 큰 위기는 실패가 줄어든다는 사실 자체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열성적으로 교회를 다녔다. 지금도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어머니 손을 잡고 구역예배를 가던 길에 보았던 해바라기 무리의 흔들거림, 교회 결석하려다 혼나고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울며 두드리던 초록색 철문, 그리고 여름성경학교에서 부르던 노래.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정확히 그게 문제였다. 신앙을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 천국 개념과 결부된 사후 세계의 약속이다. 임사체험으로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을 때마다 손에 땀을 쥐고 경청했다. 천국의 길은 에메랄드, 사파이어,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갖가지 보석들로 치장되어 있고 사방에 형형색색의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있다고 한다. 누구도 슬프지 않다. 분노도 고통도 시기도 질투도 없다. 기쁨과 화평, 사랑만이 가득하다. 그곳에서 우린 춤을 추고 찬양하며 살게 될 것이다. 지옥의 끓어오르는 참담함과 비교한다면, 천국의 대기에 가득한 평화와 환희란 그 어찌 가슴 설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몹시 낯설었기 때문이다. 지상의 사람들은 꿈꾸고 욕망하고 웃고 울고 화내고 사랑한다. 머릿속에선 이성이 굴러가는 소리가 덜컹대지만, 주머니 속엔 저마다 이런저런 소우주를 쑤셔 넣고 있다. 욕망이 어리지 않은 시선은 없다. 무표정한 얼굴에도 표정은 살아 꿈틀거린다. 하지만 사람의 아름다움도 추함도 성스러움도 역겨움도 모두 그 들끓는 것에서 나온다. 어린 시절의 나조차도 그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천국의 사람들은 어떤가? 오로지 아름답다. 질투도 분쟁도 없다. 배설도 없지 않을까? 고민도 병마도 없겠지. 지상에서 겪는 모든 '실패'들이 깨끗이 깎여나간 "살균된" 세계. 그렇다면 천국에서의 나는 지상에서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실패 없는 평평하고 매끄러운 세계에서 '나'는 무엇이 될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기계 장치 속의 신)'라는 유명한 개념이 있다. 연극의 갈등이 고조된 순간 갑자기 초자연적인 존재, 즉 '먼치킨'이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 기법이다. AI는 오늘날 이 '기계 장치 속의 신'의 위치를 점유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끙끙대며 고민해야 했던 과제를 손쉽게 풀어내거나 교착되어 있던 문제들을 해결해 낸다. AGI나 초지능이 등장한다면 일상과 비즈니스에서의 실패들은 사라지고 이내 세상은 평평해질 것만 같다. 평평한 세계에선 고성도 노래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매끄럽게 철컹대며 흘러가는 기계적 움직임만이 존재한다. 샤오미의 불 꺼진 공장을 보라. 사람이 없으니 광원이 필요 없다. 어둠 속에서 AI와 로봇만으로 24시간 생산이 이루어진다. AI는 분명한 성과를 내고 있는 기술이며 세계의 많은 문제와 실패들이 손쉽게 해결된다. 세상은 점점 더 굴곡 없이 매끄러워진다·····.
그런데 이 세계는 너무나도 이상적이기에 위험해 보인다. 문제는 AI가 "실제로" 성과를 낸다는 사실이다. 시행착오와 실패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AI에게 딸깍, 묻거나 시키기만 해도 해결되는 일이 너무 많다. 신입사원 채용 필요성 급락이 대표적 징후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chatGPT 등장 초기만 해도 중간관리자급 즉 시니어의 종말론이 회자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이다. 주니어를 뽑지 않는다. 도메인 지식과 경험이 축적된 시니어와 AI의 조합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이미"이다. 시니어는 AI 보편화 이전에 이미 충분히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시행착오와 실패를 경험할 시간이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시장에 진입하는 주니어들은 그렇지 않다.
문제는 정확히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봐야 프로세스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AI의 작동을 감독하고 그 결과물을 검토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역량은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 시행착오와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다. 거창한 얘기가 아니라 직접 프로세스를 되짚는 과정이 필요하다. 인간에게 이해란 석판 위에 글씨를 새기는 것보다는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는 체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위해 글감을 찾아 헤매보고, 한참 고민해 보고, 스스로 목차도 설계해 보는 경험을 수 차례 해본 사람과 아닌 사람은 글을 보는 눈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딸깍"으로 이미 써진 글을 많이 본다고 해서 감독과 검토 능력 자체가 늘 수 있을까? 감독과 검토는 오히려 'AI의 실패'를 검수하는 과정이다. 딸깍, 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프롬프트의 실패는 겪어도 그 결과물 자체의 실패는 겪을 수 없게 된다. 기획도 마찬가지이고 코드도 마찬가지이다. 과정에서 실패해보지 않고는 결과를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채용의 감소는 둘째 치고, 이제 'AI로 딸깍하면 되는 일'에 굳이 시간을 소모하며 시행착오하는 일을 기업이 인내할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왜 그걸 아직도 하고 있어요? 그냥 AI한테 물어보세요.'
요컨대 입문자는 프롬프트가 아니라 그 아래, 수작업 단계에서의 '기초적인 실패'를 경험해 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시간 단위로 고도화되는 세계에서 그런 실패는 비효율적인 시간낭비로 비칠 것이다. 주니어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실패를 위한 '헬스장'이 필요해진다. 생각해 보면 자연의 관점에서 봤을 때 헬스장이라는 시설은 기묘하다. 현대인들은 일상 속에서 충분히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굳이 시간을 내어 '움직임만을 위한 시간'을 따로 만들어낸다. 트레드밀 위의 목적지 없는 달리기라든지, 덤벨과 아령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반복 운동을 위한 시설이 바로 헬스장이다. AI라는 효율적 도구가 마련된 상황에서, 기업은 더 이상 이전 같은 종류의 '초보적 실수'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주니어는 채용의 기회를 얻기도 어렵겠지만 이제 실패를 위한 헬스장을 따로 찾아봐야 한다. 회의를 위한 회의나 보고를 위한 보고처럼, 일을 잘하기 위한 일들을 따로 해야 한다.
사실 누구도 이 정도로 세계의 구조가 빠르게 변혁을 맞이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멀리 있어 아름다웠던 무지개가 정말로 채취되기 시작해 버린 것이다. 연극은 너무 빠르게 결말을 맞이했으며('데우스 엑스 마키나'), 더 멀리 떠나야 했던 주인공이 헐레벌떡 귀가해 "파랑새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버린 셈이다. 하지만 그래도 정말 괜찮은 것일까? 세계는 이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게임 속으로 진입했고, 그 게임은 누가 더 빠르게 세계를 효율화하여 실패를 최소화하느냐를 목표로 한다. 커튼콜이 이르다. 우리는 살균된 세계에서도 살 수 있는 것일까? 일상에서 사라진 실패는 더 커다란 실패를 낳게 되지 않을까?
천국을 간증하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에서 들리는 듯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