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따라 시작된 삶, 그리고 사랑하게 된 섬
회사가 이사를 했다.
사전 예고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반가운 이사는 아니었다.
서울의 사무소를 모두 정리하고 지방으로 이전한다니 이런저런 뒷말이 나올 법했다.
판매, 인사, 재무 등 기존 서울사무소의 임직원들과 함께, 공장에 있던 회계·감사 부서 등도 함께 불려왔다. 겉으로 보자면 이른바 ‘집적화 조치’로 보였다.
(회사의 이사 사정에 대해서는 이쯤에서 줄이자.)
어찌 되었든 회사가 이사를 가니, 딸린 식구들에게도 움직임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미 주말부부 5년 차였던 나와 가족에게도 선택의 시간이 왔다.
회사 이전만 아니었다면 월요일 출근, 수요일 퇴근. 그리고 목요일 출근, 금요일 퇴근하는 세미 주말부부의 삶이 계속되었겠지만, 그 역시 가족과 매일 부대끼며 함께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보, 우리 회사 이사 가는거 있잖아, 결국 우리 팀도 같이 간다네.”
“그래? 그럼 더 멀어지는 거 아냐? 수요일엔 못 오겠는데?”
“그렇지. 그래서 이제는 우리도 같이 이사 가는 게 어떨까?”
“그래? 그게 좋겠지? 그러자! 가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시원하게 대답했다.
5년 이상의 주말 부부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우리 가족이 함께 뭉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든 이곳 거제를 떠나는 날도 정해졌다.
태어난 곳도, 학창 시절을 보낸 곳도 아니건만, 어쩌다 이렇게 애틋한 마음이 들었을까.
모교가 있는 곳도 아니고,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그 서울도, 그렇다고 한때 한달 살이 열풍이 불기도 했던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섬 제주도도 아닌데 말이다.
떠나는 날이 다가오자 이 동네의 산과 바다, 들여다보지 못한 동네가 아쉬워졌다.
뒷산에도 한번 올라가보고 싶고, 저 앞바다에 발도 한번 더 담가보고 싶었다.
서핑을 배워야지, 카약도 타야지 생각만 했던 것들이 후회로 남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저리도 행동으로 잘 옮기는지, 대단하게 느껴졌다.
거제의 크디 큰 매력 중 하나는 누가 뭐라 해도 태평양을 향해 뻗어 나가는 시원하고 탁트인 그림 같은 바다 풍경이다. 섬 면적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지만, 해안선 길이는 오히려 탐라보다 두 배가 훌쩍 넘는다.
리아스식 해안 덕분에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고, 일찍이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1080번 지방도를 따라 남부 해안로를 돌고 망산 전망대에 올라 남으로 바라보는 경관은 가히 살아있음이 축복임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푸른산과 드넓은 바다 그리고 오밀조밀한 섬들로 이루어진 세상에 없는 천상의 광경들로 설사 오랜만에 산에 오르는 저질 체력가들에게도 ‘오느라 수고했어 경치 한 모금 보고 쉬엄쉬엄 돌아가’ 하는 것 같다.
다만 남부 해안도로는 자주 방문하기 어렵기에 나는 거가대로를 따라 부산에서 거제로 들어오는 길을 좋아한다. 특히 장목면을 지나 흥남해수욕장부터 외포 해안가를 따라가는 길은 여러 거제 도로 중 단연 백미다. 복잡한 일상에 지쳐 있다가도, 넓고 고요하고 청명하기까지한 바다를 마주하면 머릿속이 맑아지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우리 가족끼리, 혹은 친구 가족들과 캠핑 의자와 간단한 먹을거리를 싸들고 바닷가에 자주 나갔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온 적도 많았다. 그러다 내가 다른 직장을 구하고 주말부부가 되면서 토요일과 일요일이 더는 여유롭지 못했고, 아이들도 크며 주말이 전 같지 않아졌다.
예전 회사에 다닐 때, 한 선배는 거제와 서울을 오가며 사실상 ‘월말부부’ 생활을 했다. 거제에서 카약을 시작하더니, 결국 개인 카약까지 마련하셨다. 얼마나 자주 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나이에 새로운 취미를 아무렇지 않게 시작한 모습에 감탄했었다. 그땐 나도 ‘꼭 배워야지’ 했는데, 역시 마음먹었을 때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는 걸 이제야 실감한다. 지인들 중엔 서핑보드를 들고 수시로 파도를 타러 다니는 분들도 많았는데, 나에게는 그냥 마음속 그림에 그친 보드가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거제 사람들의 매력에도 나는 푹 빠졌었다.
거제의 많은 직장인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다. 수도권, 전라도는 물론 충청도, 강원도, 인근 경상도 출신들도 많다. 거제 출신 동료들도 많았다. 거제 출신 배우자를 만난 동료들도 제법 있었다.
마치 전 세계 사람들이 자유와 성공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는 것처럼, 두 곳의 대형 조선소가 전국의 사나이들을 불러들였다. 미국이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것처럼 거제는 한국의 사투리 용광로쯤으로 불릴법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돈이 됐기’ 때문이다. 팔도에서 모인 많은 청년들 중 한 달도 못 되어 떠난 이도 있었고, 정 붙일 만하면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도시로 떠난 이도 많았다. 아이 교육 때문, 회사 사정 때문, 여러 이유로 말이다.
그래도 대체로 거제까지 온 사람들은 풍족한 이 도시에 정착했다. 그중 또 어떤 이들은 가정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새벽부터 밤까지 땀 흘려 일했다. 그 땀이 거제 땅과 바다에 흘러들었고 그렇게 그 땀의 바다와 함께 거제는 제2의 고향이 아니라 그냥 ‘고향’이 되었다.
나뿐 아니라 가족들도 거제와 이별 중이다.
아내도 결혼 후 이곳 거제에서 친자매 같은 지인들을 만들었고, 짧지 않은 기간동안 작은 가게도 꾸렸었다. 우리 집 유일한 ‘진짜 거제 출신’ 외동딸도 어느덧 훌쩍 자라 학교생활을 즐기고 있다. 아내는 인사성 하나로만 보자면 대기업 인사(잘하는)팀에서도 탐낼 인재다. 벌써 몇 주에 걸쳐 스케줄을 짜가며 꼼꼼하게 인사를 다니고 있다. 심지어 딸이 예전에 다녔던 학원 원장님께도 따로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린적도 있다. 물론 각별하니 그랬다. 거제에 있다면야 오며 가며 볼 수 있었겠지만, 이젠 일부러 내려오지 않으면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헤어질 때 남기는 인상이야 말로 그 사람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한다. 첫인상을 잘못 남기면 만회하는데 수백배의 시간이 든다고 한다. 헤어질 때의 진심 어린 인사 한번은 그 어렵다는 첫인상도 훌쩍 넘길 진한 여운을 남길 것이라고 믿는다. 이래서 내가 우리 아내를 존경한다.
거제에 오래 지낸 분들 중에는 제2의 고향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내게는 그냥 ‘고향’이었다.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아니지만 애틋한 정이 생겼다. 또한 거제의 역사와 애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채 산업화의 과실로만 애향심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미안함은 있다. 10만 피란민의 애환이 서린 흥남철수작전의 종착지였던 거제, 이순신 장군의 첫 승전보를 알린 그 거제. 그리고 민주화 이후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곳이기까지한 인구 20여만의 지방 도시. 알면알수록 인문학적인 매력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난생 처음으로 발 딛은 이곳 거제에서 밥벌이를 시작했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참고로 아내는 거제사람은 아니다.) 소중한 우리 딸도 태어났다. 인생의 굵직한 분기점들을 이곳에서 마주했기에 더 그럴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환경도 큰 이유였다. 마음을 열고 지내면 어디든 고향 같겠지만, 아버지 같고, 스승 같고, 길잡이 같았던 이곳 거제는 나에게 ‘다시 찾고 싶은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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