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서 소비뇽블랑을 꺼냈다.
그저께 아내가 마시고 반 병 정도 남은 와인이다.
정말 거의 10년 만에 여의도 한강공원에 다녀왔다. 아내는 잔디밭에 앉아 소금집 잠봉뵈르에 와인을 즐겼지만 구내염 환자였던 나는 아들이랑 돈가스만 (겨우) 먹었다. 한 모금 마셔봤지만 할 짓이 못되더라. 와인의 신맛이 강할 때 보통 ‘날카로운 산도’ 같은 표현을 쓰는데, 목구멍이 헐어버린 나에게는 거의 난도질에 가까운 산미였다. 부럽다, 한강에서 와인이라니. 크으!
와인은 여의나루역 근처 주류샵에서 샀다. (촌스런 경기도민은 한강공원 편의점에 와인이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다행히 냉장고에 아주 칠링이 잘 된, 가격까지 적당한 뉴질랜드 소비뇽블랑이 있었다. 바로 겟.
계산대 옆에는 피크닉 하는 손님들을 위한 저렴한 와인잔들이 쌓여있다. 플라스틱잔 1천 원, 유리잔 2천 원. 집에 돌아갈 때 불편할 게 뻔하지만 주저 없이 유리잔을 골랐다. 내가 마실 와인도 아니었지만 이왕 마시는 거 맛있게 마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유리잔이 정말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플라스틱잔은 용납할 수 없다.
다행히 아내도 흡족해했고, 연신 “음~!”을 외치며 아주 맛있게도 마셨다. 한병 다 비우실 기세였으나 안전한 귀가를 위해 말렸다. 그때 남은 와인을 마시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진심으로, 하지만 무겁지 않게. 여전히 그렇게 와인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소식이 조금 늦었지만, 지난 8월에 전자책을 출간했다. 이 매거진에 버려져 있던 세 편의 글을 보고 연락 주신 에디터님 덕분에 총 서른한 편의 글을 써냈다. 그리고 그 글들을 엮어 난생처음 책이라는 것을 내보게 됐다. (매거진에 있던 글들은 책에 포함 되어있기 때문에 모두 내렸다)
쓰기 위해 마시고, 마신 김에 쓰기도 했다. 어쨌거나 와인과 깊고 가깝게 함께 했던 몇 달이 즐거웠다. 지식 측면에서는 딱히 더 나아간 게 없지만, 무언가를 좋아하는 내 마음에 대해 더 깊이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매개가 와인이었다는 것이, 선천적인 허영심이 풍부한 나로서는 나름 만족스럽다. 후후.
모자란 글이지만 와인, 또는 다른 무언가를 진심으로 즐기는 분들에게 많이 읽히길 바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속의 구절로, 소심한 홍보를 마친다 :)
코르크를 여는 설렘부터 와인 잔 바닥이 보이는 아쉬움까지. 그 짧지만 기분 좋은 낭비의 매력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누군가에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상을 능숙하게 다루고 싶은 누군가에게 나는 주저 없이 와인을 권한다. 아마 후회할 일은 없을 거다. 고작 5년 차 된 홈와족의 구구절절한 설득이 아니라, 수천 년 넘은 역사가 보장하는 믿을 만한 제안이니까.
그래서 나는, 당신도 와인을 마셨으면 좋겠다.
<얕은 지갑, 깊은 와인> 에필로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