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블루, '지름'으로 극복하기

by 광현

현대자동차그룹 HMG 칼럼니스트 1기로 활동하면서 Core Value Talk 사이트에 2020년 9월 1일에 게재한 글입니다.



지름 총량의 법칙. 사람이 일정기간 동안 쓰는 돈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는 이 유머가 마냥 농담 같지 않은 요즘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지속되면서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됐지만, 이상하게 제 주머니 사정은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거든요.


왠지 좀 억울한 마음에 지난 몇일 동안의 지출 내역을 살펴봅니다. 여름엔 항상 3만원 미만의 무지티만 입던 제가 웬일로 5만원짜리 캐릭터 티셔츠를 샀어요. 집에만 있는 아이랑 좀 더 재밌게 놀기 위해서 로보카폴리 구조본부를 주문했고요. 당장 읽지도 않을 책은 왜 이렇게 많이 샀는지… 지금 보니까 제 돈 어디 안 갔어요. 결국 다 제가 쓴 게 맞네요.



요 몇일간 제가 소소하게 지른 물건들입니다


아마 저는 낯선 곳 여행하며 느끼던 두근거림의 빈자리를 가까운 곳에서 누릴 수 있는 무언가로 채우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길어질수록 평범한 일상을 좀 더 특별하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그 중 대부분은 ‘소비’라는 키워드로 수렴됩니다. 몇 달 째 장바구니에만 담겨있던 물건을 구매하거나, 평소보다 좀 더 멋진 곳에서 하는 식사 같은 것들은 결국 '돈 쓰는 일' 인 것이죠.


저는 요즘 소비의 ‘가치로움’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매달 빠르게 비어가는 잔고를 보며 ‘내 돈 다 어디갔나’ 하는 분들이나, 코로나로 쌓인 스트레스 때문에 ‘지르기’와 ‘후회하기’를 반복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한 쯤 생각해볼 만한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관심있게 보고 있는 컨텐츠들의 소개와 함께 만족스러운 소비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좋은 경험 기억하기


푸드테크 기업 ‘우아한 형제들’의 마케팅 책임자이자, 책 「마케터의 일」의 저자인 장인성님이 최근에 '인성아 뭐샀니' 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습니다. ‘지름의 핑계를 만들어드립니다’ 라는 슬로건으로 직접 구매해서 사용중인 물건에 대한 경험을 풀어내는 컨텐츠인데요. 제가 가장 흥미롭게 봤던 영상은 우산에 대한 에피소드였습니다.



출처: 유튜브 채널 인성아뭐샀니


이 분이 홍콩을 여행하던 중 갑작스럽게 비를 만났습니다. 급하게 우산을 구매했는데 '오늘은 이걸 가방에 넣을까 말까'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정말 작고 가벼웠대요. 그래서 여행하는 내내 그냥 가방에 넣고 다녔는데, 이때의 경험이 너무 편하고 좋았던 거죠. 서울에 돌아와 좀 더 검색해보면서 '울트라 라이트 엄브렐러' 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지금은 그 (비싸고 좋은) 우산이 본인의 가방에 365일 들어있는 소지품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EP02. ‘우산 하나로 내 정신건강을 지키는 방법’ 영상 캡쳐


저는 이분이 경험을 기억해둔 것에 주목했습니다. 작고 가벼운 우산이 느끼게 해준 긍정적인 감각을 한번 더 되새기고, 그렇게 확인한 자신의 기호를 일상에서의 소비에 녹여냈어요. 과거의 어느 좋았던 경험을 그저 지나간 일로 내버려두지 않았던 거죠. 장인성님은 ‘좋은 우산’이란 무엇인지 스스로 한 번 고민해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비 오는 날이 더 이상 찝찝하고 우울한 날이 아니라, 기분 좋은 날이 될 수 있도록 자신만의 ‘좋은 우산’ 하나쯤 장만해보자고 말이지요.



EP02. ‘우산 하나로 내 정신건강을 지키는 방법’ 영상 캡쳐


언젠가 급하게 사다 썼던 편의점 비닐우산이나, 회사 공용 캐비닛에서 적당히 집어온 필기구처럼 아무 의미없이, 멋없이 일상 한 켠을 꾸준히 차지해오고 있는 그런 물건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텐데요. 무심했던 그 자리를 자신의 경험과 취향이 녹아 든 물건으로 하나씩 채워보는 일은 코로나로 설렘이 사라진 밋밋한 우리 일상을 좀 더 건강하고 다채롭게 만들기 위한 노력입니다.


제 책상을 한번 둘러봤어요. 회사 기념품과 공동 구매품으로 가득한 이 자리는 그냥 아무나 앉아도 그 사람 자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일단 마우스 패드부터 바꿔보았습니다. 언젠가는 파티션에 붙은 이름표 없이도 "아 저기 박매니저 자리야" 라고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제 작은 목표가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매일 일하는 책상에, 그리고 또 다른 일상의 공간에 한번쯤 바꿔보고 싶은 물건이 놓여 있지는 않나요?


저는 마우스 패드를 바꿨습니다


내 공간, 내 물건들을 생각하는 데에는 오로지 나의 취향, 나의 기분에 충실할 뿐이다. 내 곁에 있는 물건은 내 삶의 일부이고, 나의 반려이다.

책 <반려물건>, 모호연 저



물건의 ‘제 값’을 찾아서


저희 집은 '가전계의 애플'이라고 불리는 일본 브랜드 ‘발뮤다’의 토스터를 5년째 사용하고 있습니다. 20만원이 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디자인과 ‘죽은 빵도 살린다’라는 입소문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는 2019년기준으로 14만대가 넘게 판매된 제품인데요. 저는 그동안 발뮤다를 그저 '예쁘고 쓸 만한 물건을 잘 만드는 회사'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구매한지 4년이 지난 최근에야 브랜드 스토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발뮤다 더 토스터 (출처: 발뮤다 코리아 공식 홈페이지)


기분 좋은 감각을 저장해두었다가, 기술을 적용한 기계를 통해 그때의 쾌감을 재현하는 것. 발뮤다 모든 제품의 기획, 개발에 근간이 되는 중심 철학이라고 합니다. 제가 4년간 사용해온 그 토스터는 ‘테라오 겐’ 대표가 17살 때 혼자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지치고 힘든 여정 중에 먹었던 추억 속의 빵 맛을 생각하며 만든 제품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때 느꼈던 바삭하고 촉촉한 빵의 식감, 비가 내렸던 당시의 날씨 등을 회상하며 직원들과 연구를 거듭했고, 일정량의 물을 주입해 스팀을 발생시키는 기술과 온도제어 기능을 적용해 그때 맛보았던 ‘겉바속촉’한 빵 맛을 재현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테라오 겐 대표 (출처: 발뮤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물건을 사용했던 그간의 경험들이 좀 더 뚜렷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쓸 때 마다 느꼈던 기분 좋은 감각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고민이 녹아 있는지 이제서야 알게 된 거죠. 이제는 집에서 쓰고 있는 발뮤다 제품이 4개로 늘어났는데, 이제야 요놈들이 제 값을 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마음 한켠에 찝찝하게 남아있던 과소비에 대한 죄의식이 만족스러운 소비감정으로 전환된 순간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식상하고도 부정할 수 없는 이 명언은 소비라는 테마에서도 역시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소개하고 싶은 건 발뮤다가 아니라, 이 브랜드 스토리를 접하게 된 매거진<B>라는 책입니다. 저는 최근에야 알게 됐지만 이미 워낙 인기있는 매거진이라 잘 알고 계신 분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광고 없이, 한 호에 하나의 브랜드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매거진<B>는 독자적인 관점으로 선정한 다양한 브랜드의 깊이 있는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잡지입니다.



매거진<B> 홈페이지 ( https://magazine-b.co.kr )


‘B’는 브랜드(Brand) 와 밸런스(Balance)를 의미합니다. 매거진<B>는 실용성, 아름다움, 합당한 가격, 고유의 철학이라는 네가지 축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브랜드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2011년 11월에 창간되어 현재 84호까지 발행되었는데, 지금까지 유튜브, 지샥, 블루보틀, 샤넬, 반스, 화요, 이케아 등 분야에 관계없이 <B>의 관점에 부합하는 다양한 브랜드를 다루었습니다.


출처: 인사이터, insight-er.com


비캐스트(BCAST) 라는 이름의 공식 팟캐스트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잡지의 주요 내용을 조수용 발행인의 아내인 가수 박지윤씨가 읽어주는 오디오 클립인데요. 무료 컨텐츠이지만 그 깊이가 절대로 얕지 않습니다. 한 편당 60분 내외의 긴 분량으로 제작되어 한가지 브랜드에 대한 매우 세밀한 이야기와 인터뷰를 담고 있습니다. 팟빵 어플리케이션이나, 애플 팟캐스트,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즐기실 수 있습니다.



B CAST (출처: 애플 팟캐스트)


매주 발행되는 뉴스레터를 통해 즐기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기존에 발간된 책 내용과 새로 진행한 인터뷰, 에디터들의 컨텐츠를 큐레이팅해서 그때 그때의 상황과 트렌드에 맞는, 일상에 영감이 될 만한 브랜드 스토리를 전합니다.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구독 신청이 가능합니다.


‘소비’라는 행위를 돈 쓰는 일로만 국한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브랜드에 담긴 스토리와 철학에 관심을 갖는 일 역시 소비 행위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내가 쓰고 있는 물건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소비 결정에 더 큰 만족을 얻기 위한 일인 것이죠.


컨텐츠 시청의 주권을 소비자에게 제공한다는 철학으로 광고를 없애고 자체 제작 시리즈의 한 시즌 전체를 한꺼번에 공개하는 넷플릭스, 아이스크림을 어른들의 길티 플레저로 재정의한 하겐다즈, 친환경에 대한 타협없는 고집으로 업계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파타고니아. 저는 매거진<B>가 소개하는 다양한 브랜드 스토리를 접하면서 이야기가 담긴 소비의 재미와 가치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Co-Creation (공동창조)


지난 5월 1일 아침, 서울 연남동의 한 건물 앞에 200미터가 넘는 행렬이 늘어섰습니다. 입장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전시장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기념품을 사고, 아무런 기능도 없는 회원카드를 발급받습니다. 이 분들은 아침부터 줄까지 서 가면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편집샵 오브젝트에서 열린 모베러웍스 노동절 전시 (출처: 유튜브 채널 MoTV)


이 행사는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유쾌한 물건을 만드는 브랜드 '모베러웍스'에서 기획한 노동절 이벤트였는데요. 핫한 문화 트렌드를 소개하는 ‘현대카드 DIVE’ 를 포함해 여러 미디어에서 이미 다루었을 정도로 신선한 브랜딩 사례로 주목받고 있는 브랜드입니다.


출처: 현대카드 DIVE 공식 홈페이지


이 날 행사에 참여한 사람 대부분은 MoTV 라는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입니다. 라인프렌즈 디자인 팀장으로 일하던 ‘모춘’은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보겠다며 2019년 8월 퇴사를 결심했고, 그 이후 퇴사 송별회부터 브랜드 기획, 캐릭터 디자인, 제품 제작까지 모든 과정을 유튜브로 공개하며 구독자들과의 소통을 이어왔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모베러웍스 제품 기획, 제작 과정(출처: MoTV)


모베러웍스는 ASAP (As ‘Slow’ As Possible), 스몰 워크 빅 머니, 노 아젠다와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농담 섞인 메시지를 의류나 문구 제품 등의 디자인에 담아 일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위트 있게 풀어냅니다. 그들이 제안하는 재미와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 2020년 8월 기준으로 구독자수가 1.6만명을 넘어섰습니다. 구독자들은 구상 중인 내용에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때로는 제품 아이디어를 직접 제안하기도 하면서 모베러웍스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출처: 모베러웍스 인스타그램


앞서 발뮤다 이야기를 통해 전해드린 내용이 이미 만들어진 브랜드를 좀 더 자세히 파보는 브랜드 디깅(Digging)에 관한 것이었다면, 저는 모베러웍스의 사례를 브랜드 다이빙(Diving)이라고 정의해보고 싶습니다. 만들어지는 과정에 소비자인 우리가 직접 뛰어들어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이죠.


분야와 규모에 관계없이 정말 다양한 브랜드들이 컨텐츠화, 미디어화를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소비자와 브랜드가 쉽게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컨텐츠에 대한 반응은 다시 창작자에게 영감이 되고, 그것은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소비자에게 새로운 경험으로 돌아옵니다. 소셜 미디어의 성장과 함께 창작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출처: 유튜브


이런 환경을 즐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생각을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구매 행위를 통해서 공감가는 브랜드의 철학과 메시지에 연대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적극적이면서 몰입도가 높은 소비 방식입니다. 결국 더 가치 있는 소비를 하기 위해 먼저 해야할 것은 '가성비'라는 단어에 의존한 구글링이 아니라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스스로의 취향과 기호에 대한 관심입니다.



코로나 블루, '지름'으로 극복하기


요즘만큼 ‘일상’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자주 언급된 적이 있을까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언제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며 코로나 이전을 그리워하기도 하지요.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저는 오늘을 좀 더 잘 살고 싶은 욕심을 느낍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가 아니라, 이렇게 갑갑하지만 지금 내 손에 분명하게 쥐여져 있는 오늘을 나의 일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비가 그 통로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늘 하던 소비에 대한 새로운 관심입니다. 그저 제 경험과 생각을 담은 단편적인 글이지만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가치로운 소비의 정답을 발견하고, 새로움에 허기진 일상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부족한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신예희에게 소비란, 건강하고 단단한 생활의 선순환을 이루는 고리다. 어떻게 해야 소중한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 행복의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방식이다.

책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신예희 지음





<작성에 참고한 컨텐츠들입니다>


- 유튜브 채널 '인성아 뭐샀니' ( https://www.youtube.com/earthwide )

- 브랜드 다큐멘터리, 매거진 <B> ( https://magazine-b.co.kr )

- 유튜브 채널 MoTV ( https://www.youtube.com/MoTVshow )

- 위클리비즈 칼럼 「대중이 전문가만큼 똑똑해지는 시대… 소비자를 참여시켜라」 (박기완 교수)

- 금융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 '베러투머로우' 모베러웍스 인터뷰 「충분히 모험해도 괜찮아」 ( https://better-tomorrow.co.kr )

- 책,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출판사 드렁큰 에디터 / 신예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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