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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젠가 Dec 28. 2023

불안이 몰려올 때

남편의 종양제거 수술을 앞두고

나는 막연하고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느니 확실한 불행이 더 좋다.

가장 힘든 건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황을

체념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삶에서 가장 힘든 건 이런 것. 모호하거나 예견된 불행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예견된 불행에서 내가 대비할 수 있는 최선을 대비하려 하는 노력을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대비하는 최선의 노력이 무쓸모 하다는 무력감을 느끼는 것. 그것이 힘들다.



남편이 조직 검사를 하였는데 결과가 애매해 종양 제거술 날짜를 받아놨다.

예견되는 몇 가지 미래에 대비해서 현실을 돌아봤다.

남편에게 요즘엔 정말 약이 좋아라든가. 악성이라고 해도 초기에 발견된 상태에 전이가 없으면 제거하면 되고 오히려 건강관리 잘해서 기대 수명이 더 길어라던가

아직 악성종이라는 확신이 없으니 더 깊게 생각하지 말고 눈앞에 보이는 현실만 대비하자라든가 하고 큰소리쳤지만 사실 무섭다.




내가 그 분야의 의료 전문가를 검색하거나 아직 진단 코드도 나오기 전의 의뢰서만 가지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는 그 답게 또 그저 현상만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 현상 뒤에 예견되는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계획을 짜 놓고 있다.

남편은 항상 예견되는 불행이 있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품 안에 닥쳐야만 그것에 대응한다. 대부분의 대응은 무대응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질병이나 불행에 대비한 준비가 없다. 그냥 , 산다.

내가 자식, 나, 남편, 자동차, 집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과 자산들의 질병이나 손해에 대비한 보험을 하나씩은 다 들어 놓은 것에 비해. 그는 그런 대비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어쩌면 내가 미리 다 해놓기 때문에 그에겐 내가 믿는 구석일 수 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의 이런 준비나 대비는 하지 않지만 도전을 즐기는 성향들은 사업 실패를 가져오기도 했고 나는 이런 그를 단절할까 함께 그 결과를 떠 앉으며 해결할까의 갈림길에 서 있던 적이 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서 도망쳤던 그가 돌아왔을 때 그를 붙잡으며 그 재앙을 같이 해결해 주겠다고 하고 그에게 딱 한 가지 다짐을 받았다.


제발 자신을 돌봐라. 그리고  혹시라도 당신이 부재한 인생에 남게 될 가족을 위해 작은 대비라도 해달라.

의료적 리스크에 대응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는 대비책이니 암보험 실손 보험은 꼭 들어놔라.


나는 당신이 꽁지를 내빼고 도망갔을 때 당신이 부재한 상태에서도 감당해야 하는 일상이 제일 무서웠다.

그때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면 이건 너무나 불공평한 형벌이라는 생각이 들며 큰 불안이 나를 잠식했었다.

그러나 당신이 돌아왔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함께 이겨내려고 한다. 하나만 약속해줘야 한다.

앞으로 당신이 그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녀들과 내가 대비할 수 있도록 보험을 들어야 해.

암과 실손. 이 두 개는 꼭 알아서 들고 유지해 줘. 하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 이후 우리의 경제적인 손해는 조금씩 감당할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돌아가신 아버님이 보험이나 대비책 하나 없이 투병하셨고 최고급의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 가진 모든 걸 다 소모하셨다는 걸 알고 이제는 아무런 준비 없이 홀로 남게 된 어머님에 대한 심리적 걱정 더하기 실제 부양에 대한 경제적 걱정이 더하여져서 그에게 또 부탁했다.


"당신에게 많은 거 안 바래.  나를 저렇게 되게 하지 마. 서로가 서로에게 건강도 위기도 미리 대비해 두자" 하고


남편의 검사 결과 내 눈에 보이는 이상 증식 조직이 암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힘든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남편만 백 프로 걱정할 수 없이 그 길을 함께 걸어야 할 나와 내 자식에 대한 걱정도 함께 들었다. 그래도 지속적으로 그에게 다짐시켰던 보험이 있으니 어찌 저지 헤쳐나갈 수는 있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남편은 나 사실 보험이 없어로 말을 바꿨다. 네가 말했을 때 안 들어놨어.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었고 저런 본보기를 보았고 옆에 있는 내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이러지?


제발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위험에는 대비를 해달라고 그리 부탁했는데

내 남편은 정녕 진짜 나에게 그동안의 빚구완으로도 모자라 이젠 보험하나 없이 병구완을 시키려는 건가?


아주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는 이 불행의 대상자이자 당사자인데. 그가 가장 힘들겠지.


"아주 작은 최소한의 보장만 되는 거 있어. 혹시 해서 내가 당사자 동의 없이 배우자 동의 만으로 가능한 거 작은 거 들어 놓은 게 있으니 일단 당신은 다른 걱정 말고 수술받자. 근데 그건 크게 도움 되는 건 없을 거야. 워낙 보장 범위도 작고 당사자가 아니라서 특약 같은 것도 못 넣었어. 그런 건 본인이 들어야 하는 건데. 내가 그렇게 부탁했잖아" 하고 대답하자 그는 앞 말만 듣고 그를 원망하는 뒷말은 하나도 안 듣고 오 개꿀인데? 하는 반응을 보인다.



큰 병일지도 모를 사람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고

만약 이 길이 험하고 힘든 길이 된다면 또 내가 그를 업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니

불안감에 잠이 안 온다.

막상 그는 코를 골면서 잘 잔다.

본인이라도 잘 자서 다행인 건가?

당사자 보다, 그 당사자를 감내해야 하는 내 현실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정도뿐인 배우자라 미안하지만 , 솔직히 늘 나를 무서운 현실로 내모는 그가 원망스럽다.


그렇지만 나는 또 이겨 내겠지. 감당해 내겠지.


여보. 이젠 고맙다는 말 미안하 다는 말 그런 거는 넣어둬.

상대방의 단점과 약점을 알고 그것을 메꿔가 주려고 마음먹은 배우자와 삶을 사는 건 엄청난 행운이야. 제발 당신이 가진 행운을 소중히 여기고 그런 걸 가진 자신 스스로는 더 소중히 여겨 주길 바라. 그리고 그 힘으로 스스로 일어서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당신을 감내하겠다는 건 당신이 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완성형이 되어 가는 그 과정을 함께 지켜봐 주겠다는 거지 무조건 기대고 보는  존재를 업어주고 수용하겠다는 건 아니야.


그렇게 부탁한 보험을 안 들어 놓은 건 어쩔 수 없지. 과거는 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앞으로가 진짜야.

어떤 싸움이 될지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몰라

불확실해.

나도 두려워.

그러나 또 같이 싸워줄게. 이번 싸움에서는 제발 먼저 도망가지 말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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