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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
절대적인 순수가 그리울 때
by
언젠가
Dec 1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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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은 처절하고 삶은 지난하다
.
지난 2년의 짧은 시간 동안 말도 안 되는 사회적 재난들(이태원 압사사고, 오송 지하차도 침수, 젬보리 파행)을 목격한 데다가 그런 사회 재난 이후에도 시스템의 개선의 여지는 없이 수습과정에 파행을 거듭하는 걸 보면서
분노
, 무력감 사이에 방황한다.
나는 작년에 이태원 압사사고를 보고 가장 크게 절망했던 게
사고 후 대통령이 유족들을 향해
돈주겠다고
발표한
부분이었다.
우리 모두 너무나 비현실적인 사고와 시스템의 부재를 목격하고 충격에 휩싸였었다. 그리고 정신 차려보니 자식을 잃은 유족이 보였고 그들에게 감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언론에 나와 '충분한 보상을 약속한다'는 대통령의 발표가 너무나 기묘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사고가 있을 수 있나 의문이 생기고 행정력이라는 게 존재하나 싶은 의문이 생기는 인재 앞에서 행정부의 수장이 제일 먼저 꺼낸 말이 '돈'이라는 것.
우린 그런 시대를 산다
.
일주일 전만 해도 이상고온에 반팔을 입었는데 갑자기 영하로 떨어져
한파를
경험하며 너무나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서 그런 걸까? 우리는 지난 일들을 너무 빨리 잊는다
그리고 지난 일을 잊지 말자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고
나이브한 존재들이라 여긴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우린 돈 벌어야 하니까 좀 잊어버리라 한다.
이태원 사고는 세월호 때처럼 우리 사회 전체에 공동트라우마를 안겨줬고
그 이후 용산구청장이 보석으로 풀려나고
업무에 복귀한 걸 보고 무력감은 더해졌다.
모두가 어제는 더웠지만 오늘은 얼어 죽는 날씨에 적응해 가며 어쩔 수 없지 지구온난화가 내 탓인가? 하듯 어쩔 수 없지 시스템의 부재가 내 탓인가? 하며 또 산자들은 산다. 개구리가 냄비에서 서서히 서서히 익어가는 줄도 모르고.
나 같은 예민하고 불안도가 높은 개구리들은 그런데 괴롭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올해가 또 이렇게 지나가 버리는 게 무섭고 어제 쪄 죽은 개구리가 오늘은 내가 될 수도 있는데 왜 다른 개구리들은 다 참고 살지? 나도 그럼 참아야 하나? 반문한다.
그럴 때 때마침 찾아온 절대적인 순수의 존재
파리나무십자가 합창단을
만나게 되었다
10-17세로 구성된 소년들이
미성으로 성가를 부른다
소박한 나무십자가를 매고 간결한 수도복을 입고 무대에 오른 그들을 보면
종교적 구원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동굴로 들어간 유럽의 어느 깊은 산골 수도원의 수사님들에게서 느껴지는 성스러운 기운까지 느껴진다
그들은 수도자도 아니고 수도복을 입은 그저 노래 잘하는 소년들일뿐이지만 그들이 상징하는 절대적 순수와 때 묻지 않은 성스러움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이 주는 힘이 있다
소프라노 영역을 가뿐히 소화하는 미성의 소년들이
불러주는 '아베마리아'는 성스러웠다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불러주는 앙코르곡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는 가슴 깊이 따스한 위로를 전해 주었다
한국인들은 아리랑만 들어도 운다고 하는데
나 역시 불어만 쓰던 프랑스 소년들이 한국어로 불러주는 아리랑을 듣고
갱년기인가 왜 이러지 싶을 만큼 눈물이 났다
절망의 시간
위기의 시간
우리에게는 없는 절대적 순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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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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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을 키우며 살고 있고 수 많은 남의 딸 들을 돌보는 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행복하지만 언젠가 더 많이 행복해 질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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