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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젠가 Jan 31. 2024

관조. meditation.

남편

지난 몇 달간 또 마음이 무겁다.

잠이 들었다 새벽에 깨기도 하고 가슴이 짓눌린 듯 답답하고 불안하다


작년 여름부터 잘 지내는가 싶던 남편이 가게가 어렵다는 걸 호소하며 가정 생활비를 사용하는 내 카드로 가게의 물건들을 결제하기 시작했다.

나는 카드 결제일이 도래할 때마다 매달 한도가 꽉 차게 끊긴 카드값을 바라보며, 한참 교육비가 들어가야 하는 입시를 앞둔 아이가 원하는 학원 수업료를 결제할 수 있을까? 이번달 내 월급은 이만큼, 생활비는 이만큼, 남편 가게에 들어간 건 얼마 하며 주판알을 튕기며 그래도 아이의 교육비는 낼 수 있도록 아등바등해야 했다. 펑크가 날 것 같을 때마다 다행히 조금 가지고 있던 주식이 올라서 팔아서 메꾼다든지, 기대도 안 하던 곳에서 집필 요청이 들어와서 고료를 받는다든지 해서 아이의 학원은 끊기지 않고 보낼 수 있었다.


나는 당연히 남편에게 가게 경제와 집안 경제를 분리시켜 줄 것을 요구했고, 가게가 많이 어려우면 그래서 지금 유지하고 있는 생활이 안될 것 같으면 다른 방안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남편은 또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갭 투자를 해 놓고 전세 내놓은 1기 신도시 집의 재계약시점에 전세금인하 요청을 하는 세입자의 말에 따라 손해가 나더라도 그걸 팔 것인지,

대출을 받아서라도 전세금을 낮춰주고 지금 세입자의 갱신권을  유지할지 의논을 하자 시큰둥하며 그 집은 네가 산거고 어차피 니 거니 네가 알아서 하라던 반응을 보였던 남편이 내가 알아서 겨우 자금을 마련해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일부 인하해 주고 재계약 세팅을 하고 한숨을 돌리자마자 그 집은 시세가 얼마인지, 지금 팔면 얼마나 남는지에 관심을 보이다 급기야 좀 팔아서 자기 사업 자금을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는, 지금 부동산이 장기 불황이지만 그래도 전세가 받쳐주는 1기 신도시라 조금 더 유지하고 싶다. 지금 겨우 전세 세팅했다.(그 전세금 인하 해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남편은 나의 일이 아니다 하며 냉담하게 강 건너 불구경했는지, 그런 남편에게 얼마나 서운 했는지는 더 설명하지 않겠다.)  전세가는 조금 안정되고 매매가가 아직 불안정한 이 시점에 팔아버리면 남는 것도 없어서 당신이 원하는 만큼 자금 조달이 안된다. 게다가 저 집은 우리 아들이 대학입시 결과가 좋아서 인 서울 하게 될 때를 위해서 대비해 놓은 집이다. 나는 아들의 미래를 저당 잡히고 싶지 않다고 설득했다.


내 말을 이해하고 조금 잠잠해졌나 싶더니 그 사이에 (조직 검사 결과 양성종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남편의 종양 절제술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아들의 건강 이슈에 냉담하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시댁과는 달리 처가 식구들이 너무나 걱정하고 염려하며 수술비를 보내주고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자 이 양반이 엉뚱하게 아, 처가 식구들은 비빌 언덕인가 보다 싶었는지 이번엔 처가에서 돈을 좀 융통해 오면 안 되냐고 부탁했다.


남편은 지금 새로운 도모를 하고 있는데(지겨워,,맨날 뭐했다 치우고 또 새로 하고  어휴; ;;; 하는 내 마음은 일단 뒤로하고 그의 새로운 도모를 응원한다;) 자금이 절실하다. 내 판단에는 새로운 도모를 하려면 자신의 능력으로 대출을 받거나 자금을 마련해 놓고 그다음 단계를 밣아야 하는데 남편의 판단에는 그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 부인의 능력이나 심지어 처가의 능력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6년 전 나는 선을 그었다. 그 이전 나는 단단하지 못하고 내 한계와 선이 무엇인지 몰라서 시댁식구들과 남편에게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는 나에겐 선이 분명히 있다. 내 한계도 있다.

남편은 이번에 그 선을 넘었다.

나는 6년 전에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고 내뺀 남편을 잡아 앉혀서 ,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친정 엄마에게 물질적 도움을 받은 것 그리고 그 도움을 아직 상환하지 못한 것 때문에 간혹 여행을 가거나 비싼 와인을 마실 때는 주저되고 소비가 마음껏 행복하지 않다. 부모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떳떳하지 못해서 내 능력으로 상환을 하고 싶다.

물론 내가 행복하게 잘 살고 내 가정을 잘 건사하고 내 자식들을 땡실하게 잘 키우는 게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여기며 내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산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그때 선과 한계를 분명히 했다.


이게 선이고, 이 선을 넘어오면 안 된다. 이 선을 지키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를 위해서 제일 중요하다. 사람을 살다 꺾일 수 있다. 그런데 꺾인 무릎을 펼 수 있는 건 스스로 힘뿐이 없다. 제발 이제부터는 본인의 힘을 키워라. 나는 불안도가 높은 사람이다. 나 역시 나를 잘 모른 채로 당신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내가 알고 기대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당신을 버리거나 우리의 관계를 단절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는 이제부터 나부터 알고 나부터 일으켜야겠다. 그러니 당신도 제발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 보고 스스로부터 일으켜줘라 하고 다짐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아직도 모른다. 오히려 이제는 아무런 기댈 구석이 안 되는 시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다들 자리 잡은 내 형제들이나 내 부모는 힘이 있는데 아니 그가 보기엔 나 역시도 그를 지탱해 줄 힘이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절실하게 이렇게 마지막으로 한번 애써보려는 자신을 도와주지 않느냐고 서운해한다.


그 서운함의 표현인지,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새 사업 준비를 한다며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나는 과거에 이미 한번 이런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황을 겪었고 그때 그의 부재를 겪었다. 그때 나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었다. 상황은 지나갔고 문제는 수습되긴 했지만 그에게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잠은 집에서 잘 것, 내가 전화를 하면 받아 줄 것 을 부탁했는데 그와 연락이 안 되면 불안해할 이런 나를 잘 알면서도 그는 지금 당장 자기가 새로운 도모를 하는데 상대적으로 강자인 나에게 혹은 내 친정에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나에게 이렇게 치졸하게 나를 흔들며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나는 사실 불안하지 않다.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 나는 나를 들여다 보고 나를 관조한다.

결혼 당시 나는 내 자아도 못 찾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힘든 결혼 생활 20년 동안 결혼이란 내가 나를 잘 아는 시점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계속 들여다봤다. 맞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남편보다 힘을 가졌다. 스스로를 알려고 애쓰는 사람만큼 강한 사람은 없다. 그리고 스스로의 선과 한계를 알고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은 절대 약하지 않다. 그런데 남편은 스스로를 알려는 노력 ,스스로 일어서려는 노력없이 , 마치 불같고 용암같고 활화산 같던 그를 겪고 그의 부모를 겪으며 스스로를 단련하고 제련해 강해진 나에게 또 기대려 한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나도 나를 몰랐기에 그가 그를 모르고 스스로 일어서려 하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그를 단절하지 않았지만 그에겐 그 이후로 시간과 기회가 있었다.

그만 몰랐을 뿐. 아니 알려하지 않았을 뿐.


나는 부부사이에 의리를 지키고 애착하는 그 결혼이라는 제도를 좋아한다. 내가 독점적이고 애착적인 관계에서 안정을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애착 관계를 빌미로 상대에게 기대기만 하려는 관계, 부부 사이에 균형이 깨진 관계, 의무감만 남는 관계까지 감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젠 남편이 전화를 안 받아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가 어떤 말을 해도 어떤 부탁을 해도, 나에게 어떤 요구를 해도 이젠 서운해하거나 그런 시간을 이겨낸 나에게 또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고 분노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분노한다. 그러나 그 분노의 감정까지 이젠 받아들이고 흘려 보낸다.


그냥, 그를 관조(meditation)한다.

지켜보고 관찰하는 (observation)  관망하는 (wait and see) 것이 아니다. 고요히 나를 관조했고 이제는 고요히 그를 관조한다.

그가 무너지든 일어서든 그가 어떤 상태이든 그는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 소중한 사람이고 내 애들에게 중요한 존재이다. 그가 원하는데로 늘 장담하던 데로 그가 돈을 많이 벌어서 마누라 편안하게 해주고 자식들 교육 잘 시키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나는 더이상 괴롭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스스로 일어서길, 내 앞에 다시 당당히 나타나길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한다. 그렇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나는 더 이상 그를 원망하지 않고 그 때문에 아프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담담히 내 길을 갈 수 있다.

내가 아닌 타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볼 때. 그를 관조해 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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