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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Feb 01. 2019

어쩌면, 우리는, 만약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괜찮을지 모른다.


출근길 방배역 계단에서 핸드폰을 살짝 떨궜다. 늘 심하게 떨어뜨려도 멀쩡하던 폰이라 설마 했지만, 이번엔 박살이 났다.


손이 베일 정도로 액정에 금이 잔뜩 가버렸지만 의외로 마음은 담담했다.

안녕, 나의 아이폰7 레드...!


“이참에 벼르고 있던 아이폰 XS로 바꿔야겠네.”


마침 아이폰 7을 샀던 핸드폰 매장에서 기기변경을 해준다는 연락이 한참 오던 찰나라 문자를 남겼다.


오늘 가도 될까요?


친절하게 전화가 오고, 무슨 일인지 내일까지만 기기변경이 가능하단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더는 아이폰 7에 미련이 없는 상황, 당장 가겠다고 말하던 중 박살난 액정이 맘에 걸려 상황을 설명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아이폰 공식수리센터에 가서 22만 원이나 주고 핸드폰을 수리했다. 박살난 액정을 가져가면 기기변경 시 지원금을 거의 못 받을 수 있다는 매장의 설명 때문이었다. 마침 파손보험을 들어놨으니 보험료로 수리비를 커버할 생각으로 과감하게 카드를 긁었다.


난 왜 이렇게 늘 사서 고생을 할까...?


수리센터 직원은 제일 먼저 백업 여부를 체크했다. 백업? 그게 어떻게 하는 거더라. 언제부턴가 백업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로 핸드폰을 바꿔왔다.


전화번호는 네이버 주소록으로, 사진은 구글 포토로 대충 동기화를 시켜놨으니 다른 건 크게 미련이 없었다.


그보다, 찍어놓은 사진이나 영상을 다시 보는 경우가 내 인생에서 몇 번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게 결정적이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지만 남은 사진도 다시 안 들어다 보면 무용지물이니까.


수리 과정에서 모든 데이터가 날아갈 수도 있는데 괜찮냐는 질문에 가볍게 괜찮다는 답을 하고 핸드폰을 맡겼다.


수리한 폰을 들고 새 폰으로 바꾸기 위해 -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프로세스인가! - 퇴근 후 매장을 찾았다. 그곳의 직원 역시 백업을 했는지부터 확인한다.


백업... 중요한 건 한 것 같아요.


전보다 더 애매모호한 답변을 한 채로 새로운 폰 구입 계약서를 작성했다. 문자라도 옮기겠냐는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이튠즈 비번을 끝내 찾지 못했다. 카톡이 없던 시절엔 문자가 그렇게 소중했는데 지난번에 교체할 때 이미 과거 문자를 모두 잃어버려서 상관없었다.


이상했다. 오래된 폰의 그 어떤 것도 옮기지 못한다 해도 예전만큼 슬플 것 같지는 않았다.


페이스북과 카톡에, 인스타그램에 내 관계의 기록들이 남아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 마음이 그렇게 깃털 같아진 게 좋았다. 그리고 순간에 좀 더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과거는, 그 순간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핸드폰을 바꾼 다음 날, 전에 쓰던 모든 앱과 설정, 심지어는 공인인증서까지 그대로 백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해? 난 집에 가는 길에 수십 개가 되는 모든 앱을 새로 깔았는데.


백업도 안 하고 핸드폰을 바꾼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동료들의 반응이 재밌었다. 그러게. 이런 게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일까?


친구와 주고받던 작은 쪽지들마저 버리지 못해 수십 년을 간직했던 예전의 나와는 너무 다른 지금, 호들갑 떨지 않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독립하기 전, 초등학생 때부터 모았던 수많은 쪽지와 편지들을 처분했다.


어쩌면 백업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나 자신에게 맞춰 내 마음이 바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괜찮도록 나의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지.


아이폰을 쓰기 전에 썼던 폰들.


+

그리고 위에 있는 폰 중 가장 왼쪽에 있는 애니콜 폰은 영화 뺑반에서 류준열 배우님이 들고 나오는 바로 그 폰이다. 오래된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이런 재미난 행운을 가져다줬다. 영화 촬영이 끝난 후 돌려받은 폰을 다시 켜며 혹시 나의 옛날 기록들이 남아있을까 기대했지만 액정이 나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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