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관

후지모토 타츠키의 <파이어 펀치>

by 김기범


파이어 펀치는 극심한 추위로 문명이 붕괴된 세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세계에는 축복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주인공 아그니는 재생 능력을 가진 축복자입니다. 아그니는 여동생 루나와 함께 자신의 팔을 잘라 마을 사람들과 나누며 힘겹게 살아가죠. 그러나 베헴도르그의 도마와 마주친 순간부터 아그니의 삶은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도마의 축복은 닿는 모든 것을 재가 될 때까지 태워버리는 불입니다. 도마의 습격으로 마을은 온통 재가 되어버리고. 불타 죽어가던 여동생은 아그니에게 마지막으로 "살아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죠. 아그니는 강력한 재생 능력 때문에 죽지 못한 채로 끝없이 고통 속에 타들어가고. 결국 불이 꺼지지 않는 몸으로 살아가며 여동생을 앗아간 도마를 향한 복수를 다집니다.


그러나 마침내 마주한 도마는 더 이상 악당의 얼굴이 아닙니다.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며 살려달라 애원하는 피폐한 인간일 뿐이죠. 복수의 대상이 무너진 순간에 아그니가 맞닥뜨리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혼란입니다. 그 지점부터 이야기는 더 이상 단순한 복수극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만약 이 작품이 전형적인 소년 만화였다면 아그니는 도마를 쓰러뜨리기 위해 성장하는 소년의 서사를 따랐을 겁니다. 하지만 눈앞의 적은 이미 반성하는 인간이고 선악의 구도는 희미해집니다. 정의는 더 이상 주인공을 밀어붙이지 못하고 이내 멈춰버리고 말죠.


영화에서 주인공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원하는지가 곧 인물을 움직이는 커다란 힘이기 때문이죠. 이야기는 대개 욕망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세우고, 주인공은 그 고난을 넘어서며 성장합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자신의 삶을 겹쳐보고 때로는 눈물을 훔치기도 하죠. 그래서 사람들이 인생을 한 편의 영화에 비유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면 그 이야기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요.


토가타는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토가타 역시 강력한 재생 능력을 지닌 축복자이기에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 조차 없죠. 그래서 토가타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선택된 인물이 바로 아그니입니다.


토가타는 스스로를 감독이라 칭하며 아그니의 모든 것을 연출하려 합니다. 하지만 연기를 강요받으며 아그니는 자신의 욕망을 의심하게 되고. 그때부터 아그니는 더 이상 토가타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부터 아그니는 마치 만화 속에서 빠져나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지죠.


이윽고 아그니는 파이어 펀치로 불리게 되며 신으로 추앙받습니다. 그러나 베헴도르그의 시선에서는 무자비한 악마로 묘사될 뿐입니다. 도마의 불을 두른 아그니는 어느새 자신 역시 도마처럼 누군가를 재로 만들게 되면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파이어 펀치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게 구원인 동시에 또 다른 이에게는 재앙같이 여겨지죠.


이와 비슷하게 작품 내에서는 겉과 속이 어긋난 인물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여자처럼 보였던 아이가 사실 남자이거나 몸과 마음의 성별이 다르거나, 영웅이라 칭송받지만 실은 공허한 존재들 말이죠.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외면과 내면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정체성은 마치 상황에 따라 연기될 수 있는 역할에 가깝습니다.


반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세상을 얼렸다는 얼음 마녀는 실재하지 않았고 기존 인류는 빙하기가 온 지구를 버리고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남아 있는 인간들은 오히려 퇴화한 존재이며, 과거의 인류는 모든 축복을 사용할 수 있었죠. 심지어 갈등조차 사라지고 모두가 비슷한 얼굴이었음이 암시됩니다.


그러나 그와 대비되게 지금 세계에서의 인간은 장작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작열하는 아그니의 모습은 마치 꺼지지 않고 불타는 장작처럼 보이죠. 그리고 그가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은 삶은 곧 고통이라는 하나의 은유처럼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아그니는 삶의 양식을 잃었음에도 왜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아그니는 삶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여동생 루나를 붙들었습니다. 그녀를 잃은 뒤에는 복수에만 매달리죠. 살아갈 이유를 찾기 위해 자신의 원수인 유다에게서 야동생의 모습을 투영합니다. 심지어 진실을 알면서도 유다에게 진짜 루나가 아니냐고 되묻기까지 하죠. 결국 아그니는 살기 위해서 보이는 모습만을 붙잡습니다. 그렇기에 여지껏 복수자를 연기하며 버텨온 셈이죠


사실 이 연기는 아그니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등장인물들 모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타인을 위해 혹은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그들 각자의 배역을 소화합니다. 모두가 그 연기를 믿지만 정작 자기 자신만은 절대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진실도 어쩌면 연출의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독심술이 있지 않는 이상, 누구도 속마음을 읽을 수 없기에. 외면만이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증거죠. 곧 연출이라는 인위를 통해서만 우리는 서로의 진심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면에 닿기 위해 일부러 꾸며내고 때로는 거짓말을 하죠. 실상은 모든 것이 연기의 일부입니다.


오래전 유독 제 마음을 사로잡던 영화 장면이 있었습니다. 오후의 햇살이 창가로 쏟아지고, 주인공이 짝사랑 앞에서 망설이던 순간. 얼굴에는 주황빛 그림자가 비스듬히 드리워지고 수줍은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저는 그 장면이 너무 좋아서 그 빛을 직접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들고 오후 세네시쯤 거리를 돌아다닌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촬영을 전공하는 친구에게서 제작 비화를 듣게 되었는데, 그 자연광을 표현하기 위해 조명을 여덟 대나 설치했다는 겁니다. 내가 진짜라고 믿었던 빛이 사실은 치밀하게 계산된 인공의 빛이었던 것이죠. 그 이후로 저는 진짜와 진짜처럼 보이는 것의 간극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연출된 빛이었다는 사실이 그 순간의 감동까지 지워버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 장면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비록 인공의 조명이었을지라도 내가 느꼈던 감정만큼은 분명히 진짜였기 때문이죠. 이렇듯 연출된 세계 안에서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흔들립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과연 중요한가요.


과거의 아그니는 죽인 사슴에게도 기도를 올리고 또 노예들을 구해낼 만큼 정의로운 인간입니다. 그러나 도마의 불을 잃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이후의 아그니는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집니다. 죄책감 없이 살생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합니다. 단지 주변의 기대에 맞춰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죠. 그 시간 속에서만큼은 아그니는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다만 남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저는 그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제게서 어떤 모습을 기대하고는 했습니다. 나는 거기에 부응하는 데 점점 익숙해졌고, 그러는 사이 무엇을 느끼는지 보다 어떻게 보이는지를 먼저 계산하게 되었죠. 어느 순간부터는 진짜와 연기의 구분마저 흐려졌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때그때 꾸며낸 모습들로만 저를 기억합니다. 진정으로 원했던 내 모습은 잊힌 채로 말이죠.


그럼에도 어떤 순간에 느꼈던 감정만큼은 오래도록 제 안에 남아있습니다. 비록 연출된 거짓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그때의 떨림만큼은 부정할 수 없기에. 저는 그것을 나의 진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진실보다는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아그니와 루나는 나란히 앉아 영화를 봅니다. 그곳은 삶이 끝난 뒤에 도착하는 자리, 이른바 사후세계죠. 그 순간은 그들에게 주어진 휴식처럼 느껴집니다. 필자는 예전에 영화관에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일했던 극장에서는 관객이 한 명도 없는 영화는 상영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영화는 시작하지 않기에. 그러므로 영화는 누군가 바라볼 때에만 비로소 의미를 갖죠.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면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이름을 불러줄 때에야 비로소 삶은 시작됩니다. 혼자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죠. 우리는 누군가에게 불리고 기억될 때 하나의 이야기로 남습니다. 비록 그것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말이죠.


결론적으로 파이어 펀치가 묻는 것은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왜 살아가는 가입니다. 하지만 후지모토 타츠키는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죠. 다만 절망 속에서도 누군가와 약속하고 서로를 끌어안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줍니다. 이처럼 의미가 사라진 후에도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결국 우리는 괴로워도 살아가야 하겠죠. 자신의 배역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아무도 당신의 진실을 알아주지 않더라도요. 마침내 우리가 깊은 잠에 든다면, 각자의 영화관에 모여 서로의 삶을 바라보게 되겠죠. 그제야 우린 울고 웃으며 편히 쉬게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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