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관찰기
스마트폰이 이제 막 본격적으로 사용되던 2010년에 '김기사'라는 내비게이션을 처음 사용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내비게이션은 차량용 전용기기가 필요했습니다. 아이나비 같은 프로그램을 깔고 시간이 지나면 업그레이드를 해야 했죠. 여간 귀찮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된 내비게이션이 '김기사'입니다. 여러 가지 사용성 측면에서 기존 내비게이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서비스였죠. 스마트폰만 있으면 공짜로 쓸 수 있다니 조금 미안할 정도였죠. 얼마 안가서 천만 다운로드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더니 2015년 카카오에 인수됐습니다. ‘카카오 내비'로 바뀐 이후에도 저는 계속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갔던 여행지나 맛집들의 리스트가 네비게이션에 다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난달에 미련 없이 삭제해 버렸습니다. 오류가 많아지는 것도 같고, 예전만큼 똑똑하게 길을 알려주지도 않아서입니다. 사실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제 느낌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건 T맵이 꼭 SKT사용자가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티맵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2010년 당시에는 아이폰은 KT에서만 판매를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폰을 쓰는 저는 T맵을 깔 수가 없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아무리 좋다고 통신사를 옮길 수는 없는 일이었죠. 차선책으로 선택한 게 김기사였습니다. 중간에도 T맵이 좋다는 말은 하도 많이 들어서 몇 번이나 바꾸고 싶었는데, SKT 사용자들만 가능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2016년에 이미 무료 개방됐다는 걸 지난달에야 알았습니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좀 억울했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늦게 알게 된 이유는 통신사에서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지 않는 점도 있겠지만, 브랜드가 가진 시각적인 측면의 문제도 있었다고 봅니다.
리뉴얼되기 전의 T맵은 누가 봐도 SKT사용자만 써야 할 것 같은 비주얼입니다. SKT브랜드의 모티프인 리본 형태의 그래픽과 레드와 오렌지의 색상의 조합과 전용 영문폰트가 누가 봐도 SK스러운 느낌이 있었습니다. 저처럼 타 통신사 이용자는 다운로드를 받으면 안 될 것 같은 인상을 단번에 주죠. 뭔가 이질적인 만남 때문에 통신의 오류가 일어날 것 같고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을 것 같았습니다.
최근 새롭게 바뀐 T맵을 보니 참 산뜻해지고 좋아졌습니다. 더 이상 SK만의 내비게이션이 아니라, 모두의 내비게이션이 확장된 느낌입니다. SK의 색깔은 사라졌지만 그게 오히려 T맵만의 정체성과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동과 교통이 직관적으로 연상되면서도 'T'브랜드로 인식될 수 있는 명확한 가독성 또한 확보했습니다.
사실 'T'라는 브랜드는 명칭 자체가 'SKT'를 떠올릴 수 있는 강력한 장치이기 때문에, 굳이 색상이나 형태까지 SKT의 룩과의 연계성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T가 그려갈 모빌리티의 모습의 미래를 더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겠죠.
그런 점에서 색상환의 반대편에 있는 Green과 Purple, Pink와 Blue을 연결한 멀티 컬러그라디언트를 써서 이동의 가치와 Seamless한 모빌리티 경험의 넓은 스펙트럼을 잘 보여준 브랜드 리뉴얼은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살펴보니 T맵은 이미 내비게이션 점유율의 70%가 넘는 선도 브랜드답게 T맵은 내비게이션의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지도나 네비의 역할뿐만 아니라, 미래 자율주행을 위한 서비스를 준비하고, 사업자들을 위해 위치기반 서비스를 통해 사업을 성장시킬 수 있는 서비스까지 스펙트럼이 확 넓어진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020년에는 이미 SK텔레콤에서 분사해 모빌리티 전문 기업으로 변신을 선언했고, 사모펀드와 우버의 투자로 벌써 기업가치가 1조 원이 넘게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T맵처럼 SK의 색깔에서 벗어나 서비스의 개성과 특징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브랜드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최근에 나온 'T우주'라는 구독형 멤버십과 함께 T멤버십, T팩토리, T다이렉트같은 통신사업의 브랜드들 뿐 아니라, OTT 서비스인 'Wavve'나 'FLO'같은 음원 스트리밍 브랜드도 모기업의 색깔을 완전히 뺐습니다. 모그룹의 색깔이 앞으로의 사업과 이미지적으로 잘 맞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렇게 SK그룹사의 컬러코드와는 확연히 다르게 했던 경우는 이번만은 아닙니다. SK Telecom이 이동통신 사업을 시작하던 1998년부터 그룹사 CI가 변경된 2005년까지 상당히 긴 시간을 쓰고 있던 컬러 코드입니다. 아직도 제 머릿속에도 그 간판들과 011로고의 블루 색감이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렇게 컬러 코드를 이원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기존 SK라는 이미지가 화학과 정유, 테이프 생산 회사라는 소비자 인식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겠죠. 전통적인 산업을 하던 제조기업이 어느 날 갑자기 최첨단의 이동통신 사업을 한다고 한다면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기존 회사의 이미지가 새로운 이동통신 사업을 하는 이미지에는 부정적이었겠죠. 당연히 같은 그룹사라고 해도 사업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줘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T맵을 시작으로 혁신적으로 느껴지는 SK텔레콤 이미지의 변화에는 3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2022년 현시점에서도 1998년의 고민이 다시 생겼을 것 같습니다. SK하면 이제는 석유화학, 통신 기업으로도 인식되지만 바이오나 반도체를 만들기도 하고, 인수합병을 과감하게 하는 투자회사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 중 가장 중요한 한 축인 SK텔레콤이 AI기반의 빅테크 컴퍼니로의 진화하고자 한다는 계획까지 발표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도의 변화를 기존의 SK CI의 레드와 오렌지 컬러의 일변도로 커버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한계에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번째는 'T우주'라는 구독형 신규 브랜드를 보면서는 블루 색상이 레드 색상보다는 '우주'라는 메시지에 더 잘 맞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모기업이었던 선경이 처음 썼던 색상이 블루였기도 하구요. 또한 SK telecom이 한 때 썼던 색상이라서 크게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이유는 경쟁회사인 KT도 메인 색상을 '레드'를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배경색이 블랙이라서 레드와 오렌지가 매칭 된 SK텔레콤과의 색상과는 다른 느낌을 주지만 확연한 차이를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KT의 경우 멤버십 브랜드의 앱에서는 밝은 블루 계열 색상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App 다운로드 시에 통신사들의 App들이 겹칠 테고 그런 상황에서 KT와 SK의 레드를 구분하는 일이 쉽지는 않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뀐 진하고 깊은 블루 색상은 KT나 LG와의 색상과 확연히 구분됩니다.
우리나라처럼 한 기업이 다양한 성격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가졌다면 그룹사의 경우 각 사업의 이미지 전략을 세우는데 굉장한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결정 사항이 그룹사와의 이미지 연계성을 가져갈 것인가? 사업의 독립적인 특성을 감안해 독자적인 이미지를 구축할 것인가?입니다. 이 질문은 SAMSUNG, HYUNDAI, SK, LG 등의 대기업이라면 숙명 같은 일일 겁니다.
지금은 현대백화점 그룹에 인수된 SK바이오랜드의 화장품 패키지와 건강기능식품 디자인을 보고 굉장히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항상 주유소에서 보는 SK의 행복날개 로고가 패키지의 상단에 큼지막하게 올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퇴근길에 SK주유소에서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한 후 로고가 SK 로고가 붙어있는 화장품을 바르는 건 좀 어색합니다. 그 게 입으로 먹는 비타민이라면 더욱 거부감이 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화학적인 이미지의 화장품과 건강기능식품이 좋아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에 비해 T맵 브랜드의 이번 변화는 자연스럽고 좋아 보입니다. 모기업에 속해 있는 보안 브랜드인 ADT캡스나 Wavve, FLO 같은 브랜드들도 통신, 인터넷 사업 브랜드의 색깔을 버리고 독자적인 색감과 이미지를 구축하는 게 더 나은 방향으로 보여집니다.
브랜드의 이미지는 기업들이 가진 생각에 있는 게 아니라, 고객의 인식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기업의 인식을 소비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이미지 전략도 달라야 합니다. 이런 이미지 코드를 맞추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름은 그대로 두고도 얼마든지 디자인과 시각적인 장치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인식의 간극을 좁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거진 브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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