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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수 Sep 11. 2024

디자이너답지 안예쁜 기획서


디자이너가 기획을 하다 보면 이 게 기획서를 쓰는 건지, 그리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생각 없이 손 가는 대로 기획서를 작성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용은 없고 화려하게 치장된 겉모습의 화면만 남을 때가 많다. 시각적인 디테일에 신경을 끌 수 없는 디자이너의 본능이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짐작건대 나 같은 많은 디자이너들이 한 시간이면 충분히 완성하고도 남을 기획서를 폰트, 색상, 그래픽적 요소, 시각적 아이디어에 신경 쓰다가 하루가 걸릴 때도 많을 것이다


이때 시간을  많이 쓰는 것도 문제지만 내용상 중요하지 않은 그림이나 이미지가 기획서가 전달해야 할 내용을 방해하는 건 더 큰 문제다.


이러한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그 상황을 줄이기 위해 몇 가지 기준을 만들었다. 


첫째, 폰트는 한 가지로 만 쓴다. (물론 더 좋은 더 멋진 폰트들이 무수히 많다.)

아무리 기획에 잘 맞고 좋은 폰트가 있더라고 일단 가장 기본이 되는 폰트를 고른다. 명조보다는 화면상의 가독성과 적용성을 위해 고딕을 쓴다. 대신 두께가 아주 굵은 것부터 아주 얇은 것까지 있는 패밀리 폰트를 쓴다. 폰트 회사마다 기본으로 쓰는 패밀리 고딕 서체를 쓴다. 최근 프리텐드라는 무료 서체를 쓰고 있는데,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느낌이 마치 영문 고딕의 스테디셀러인 유니버스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 애용하고 있다. 특히 영문과 숫자의 완성도가 뛰어나다. 한글 서체가 좋으면 영문이 아쉽고, 영문이 좋은 면 한글이 별로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 서체는 둘 다 만족스럽다. 


본문형의 고딕 서체 하나라도 크기와 두께의 조합에 따라 얼마든지 보기 좋은 디자인의 기획서를 꾸밀 수 있다.


둘째, 색상은 3개 이하로만 쓴다. (물론 더 적합한 수백 가지 색상 조합이 있을 것이다.)

색상 기준을 잡지 않고 기획서를 쓰다가 색상 조합을 이것저것 바꿔 보는데 하루를 쓴 적도 있다. 물론 색상은 기획의 대상인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의 핵심 요소다. 색상 하나를 고르더라도 신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색상 조합만 신경 쓰다 보면 정작 전달해야 할 내용에 소홀해진다.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디자인 방향을 설정하는 기획을 하는 거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위한 본격적인 브랜드 전용 색상을 찾는 게 아니다. 그러니 색상보다 전달할 내용과 메시지에 집중하자. 딱 맞는 색상 조합을 찾는 일은 기획의 방향이 세워진 후로 미뤄도 충분하다.


특정한 색상이 내용을 방해하기도 하니 그럴 땐 고민하지 말고  흑백이나 중성적인 성격의 색상을 쓰자.


셋째, 표나 도형 등은 미리 쓸 걸 만들어 놓거나 정해 둔다. (조금 안 예쁠 수 있지만 내용 전달에는 문제가 전혀 없다.)

기획서에 쓰이는 다양한 도형이나 그래픽 등도 기획서의 완성 시간을 잡아먹을 가능성이 큰 요소 중 하나다. 별 하나 예쁘게 그리겠다고 몇 시간을 붙들고 있다가 그런 만족할 만한 별이 나오면 기획에 도움이 될까? 별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할 게 아니라 기획이라는 전체 우주를 생각하자. 기획은 말 그대로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앞으로 할 일을 설계하는 일이다. 설계도에서 별로 안 예뻤던 별이 결과물에서는 얼마든지 드라마틱한 느낌의 멋진 별로 바뀔 수 있다. 그러니 그 걸 미리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 누르고 약간은 어설프더라도 기획이 의도한 별 모양을 그리자. 그 정도 형태로도 충분하다.


넷째, 파워포인트나 키노트 같은 발표용 전문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그래픽 프로그램에서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림을 그리게 된다.)

디자이너의 경우 그래픽 툴에 익숙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터 스트레이트나 인디자인 같은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바로 기획서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게 이렇게 툴이 그래픽 프로그램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기획서를 쓰는 게 아니라, 그리게 된다. 그러면 시간은 배가 걸리고 전달하려던 내용에 대한 집중도도 떨어지게 된다. 그러니 타이핑도 변하고 구성도 변하고, 페이지별 재배치도 편한 발표용 문서 프로그램 파워포인트나 키노트를 사용하자. 경우에 따라서는 한글이나 MS 워드, 메모장 같은 문서 파일을 쓰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디자이너가 아닌 분들과도 공유하기 편리하다. .ppt 파일이나. pdf 파일로 변환하거나 공유하기도 더 수월하다.


위 네 가지 기준으로 디자인 기획서 초안을 작성하면 속도로 빠르고 수정도 금방 할 수 있다. 초안을 더 가다듬어 발표 자료를 만든다면 이후에라도 얼마든지 시각적인 완성도를 올리고 수정과 보완을 할 수 있다. 디자이너가 작성한 기획서 같지 않게 못생겼도 상관없다. 내용이 탄탄하다면 조금만 더 신경 쓰면 더 예뻐지고 잘 생긴 기획서로 재탄생할 여지는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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