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승진해야 할 거 같아. 네가 도와줘
나의 외국인 매니저와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승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내 매니저에게 기대서만은 이 목표가 달성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항상 상황을 객관화해서 보려고 노력하는데
첫 번째로 내가 적절한 채널과 소통하고 있는지 (충분히 영향력 있는) 질문했다.
입사한 지 1년 반정도 되어가는 직원의 승진에는 '임원진들의 결정'이 필요한데
저기 먼 이국땅에서 온 '필리핀계 스위스인' 매니저 한 명이 임원진들 모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는 현실적인 질문에 두 사람의 머리를 맞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렇다면, 누구와 이야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의사결정권자와 이야기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고, 가장 영향력 있는 최종 의사 결정자는 다름 아닌 '사장님'이었다.
1000억짜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수없이 많은 미팅에 사장님이 들어왔다.
그가 나의 업무적 역량을 모르는 것은 아닌 상황이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에게 내가 하고 있는 업무와 내 역량에 맞는 job grade로 조정해 달라고 말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사장님'의 의사결정에 다른 임원진들이 반기를 들면 안 되니까, 나는 다른 임원진들이 내 업무의 복잡성과 '나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고, 다행히 1000억짜리 프로젝트는 회사 주요 부서와 다 얽히고설켜 있는지라 모든 임원진들과 미팅을 수없이 해 왔던 터라 그들이 내 업무 scope과 역량에 대한 반기를 들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사장에게 1:1 체크인을 신청했다.
앞 뒤 다 자르고 내 요구만 하는 것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ambition과 goal을 갖고 있는지 얘기해주고 싶었다. 단지 이번 승진만 내 목표가 아니라,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그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랐다.
나를 소개하는 슬라이드를 만들었다.
1000억짜리 업무로 자주 미팅을 하지만, 나에 대해 얘기할 기회는 없었기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리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고 말했다.
내 지난날의 career path와 학업을 병행해 온 것들, 어떤 이유로 굵직굵직한 결정을 내렸는지, 과거에 어떤 경험, project를 통해 어떤 역량을 길러왔는지. 그리고 나의 장점과 단점, career goal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람 좋고 사람에 관심이 많은 호주 사람 사장은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경청해 주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슬라이드를 띄우고 말했다.
시작은 앞으로 나의 career goal을 위한 mentor/ sponsor가 되어 나를 support 해 달라는 것이었고
그다음에 나는 인사팀이 공유했던 job grade 표와 그 옆에 내가 하고 있는 업무의 scope에 대해 정리된 내용을 띄웠다.
결국 내가 하고 있는 업무의 scope과 나의 역량이 아무리 봐도 지금 내가 있는 C가 아닌, 적어도 B는 되어야 한다는 것과, 이 조정에 당신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사실 조금 긴장했다. 라인 매니저에게는 훨씬 더 편하게 얘기를 꺼냈지만 이렇게 사장에게 직접적으로 얘기했을 때의 반응은 사실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는 당황하지도 않았고, 그냥 고민해 보겠다고 얘기했다.
'고민해 본다'는 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나는 후회 없을 정도로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다는 데에 만족했다.
그리고 그는 1:1 면담을 마치고 나가려는 면담을 신청해 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나에게 질문했다.
"나한테 1:1 면담 신청을 한 한국 마케터는 처음이었다. 왜 다른 직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아?"
그는 그로부터 1년 반 정도 후 호주 사장으로, 본인이 원하는 자리로 갔다.
나는 종종 그가 한국을 떠나고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앞을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얘기하고 그에게 조언을 구한다.
언젠가 필요한 순간 그가 나의 sponsor가 되어 줄 수 있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