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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롱 Nov 08. 2023

3교대 간호사,  3주 유럽여행 가다

경찰에 신고당할 뻔 한 사연


 스마트폰도 없는 시절이었다. 하고 싶은 건 반드시 하고 마는 자유로운 예술가 영혼을 가진 동생이 여름방학 때 혼자 유럽 여행을 간다고 했다. 4학년 1학기 전액장학금을 통장에 묻어 두었다가 간단다.  2학년 2학기 마치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다른 세상도 경험해 보고 싶다며 필리핀에서 3개월 영어 공부를 하고 뉴욕으로 훅 떠났던 동생이다. 1년을 외국에서 지냈던 동생이지만 부모님과 나는 너무 불안했다. 그런 걱정거리를 병동의 친한 윗년차 샘들과 동기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새로 오신 팀장님이 하신 말씀을 전해 주었다.

 "여행 가고 싶으면 얘기하래. 슬립오프(sleep off. 나이트 근무 7개 하면 1개 생성되는 오프)랑 연차로 한 달 장기 오프 준다고 했어."

 어! 진짜? 나는 왜 못 들었어. 그 말을 듣자마자 가족과 상의했다. 부모님은 작은 딸 혼자 보내기 불안했는데 큰 딸이 같이 간다니까 약간은 안심하셨고, 동생은 항공권 결제 해 주는 언니가 생겼으니 좋아했다. 이제는 일만 하면 된다. ENNO의 반복. 6월 25일에 출국하기로 하였고 그렇게 4월부터 나이트 keep이나 마찬가지인 근무가 시작되었다.(나 유연근무제 시초였어?)

[D(day. 06:00-15:00 근무) E(evening. 14:00-23:00 근무) N(night. 22:00-07:00 근무)  O(off. 쉬는 날). 사실 나오데(NOD)는 토 나오고, 나오이(NOE)는 그나마 나은데 아침에 퇴근해서 잠만 자다 다음날 바로 출근하는 거라 생활리듬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고 힘들다]  



 

 하루는 아침에 퇴근해서 자다가 깼는데 부재중 전화가 열 통 가까이 와 있었다. 병동에서 온 전화다. 응?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휴대폰에 찍히는 발신번호가 병원 번호이면 보자마자 palpitation(심계항진. 매우 가슴이 두근거림)이 생긴다. 뭐야 뭐야, 나 뭐 잘못했어? 왜 전화하고 난리야? 그냥 받지 말까? 그러기엔 부재중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받았더니 친한 선생님이다.


 "야! 너 어디야!!!!!!!!"

 "네? 저 집에서 자고 있는데요."

 "어휴. 너 이번에 마지막으로 전화해 보고 안 받으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어!"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왜? 알고 보니 방에서 자고 있는 걸 몰랐던 엄마가 딸이 집에 아직 안 왔다고 병동에 전화를 했단다. OMG. 엄마가 내 방문을 열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 당시에 유도를 배우다 종아리 인대 부상으로 splint(반깁스)하고 ABR(absolute bed rest. 절대 침상안정) 중이었다. 내 방까지 걸어오기는커녕, 기어서 오기도 힘든 상태였다. 퇴근하면 항상 다녀왔다고 인사하던 딸이 그날따라 엄마가 늦잠 자고 있어 인사 없이 방에 들어가 잤던 게 이 일의 시작이었다.


 

 3교대 간호사가 3년차 주제에 3주 동안이나 오프를 받는 초유의 사태는 이 사건으로 인해 근무 중 더 많은 집중포화를 맞게 한 것 같다. 그들에게 상의를 하지 않아서 그랬나? 그들은 일하는데 나만 유럽여행 간다고 그랬나? 하긴, 한 명이 빠지면 그만큼 다른 사람이 더 일을 해야 하는 3교대 근무자의 고충이 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좀 무모한 짓이었던 것 같다. 워라밸(work-life balance)의 개념이 아직 없던 그 시절. 나는 선구자인가, 아니면 모두의 적이었던가. 결국 우리 병동의 처음이자 마지막 장기오프자가 됐다.

 하지만 힘든 병동 생활을 하며 하나씩 다시 꺼내는 유럽여행 기억은 나를 더 열심히 일하게 했으니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하련다.



사진: 런던의 한 거리. 같은 비행기를 탔는데 같은 한인민박집에서 만난 동갑의 남자와 동양인에게 길을 물어보는 런던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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