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ah, like the temperature
진짜 오랜만에 구어체로 한 번 써볼까? 마지막으로 편한 말투로 쓴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네. 오늘은 내 이름에 대한 얘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해. 내 브런치스토리 필명인 ‘Kelvin’은 실제 내 본명이야. 물론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Kelvin은 아니었어. 미국인으로 귀화하면서 내 법적 이름도 Kelvin으로 바꾼 거야. 내 한글 이름은 ‘형원’, 한자로는 형통할 형 (亨), 근원 원 (源) 이야. 친할아버지가 지어주신 걸로 기억하고 이름의 속뜻은 ‘뜻한 대로 막힘없이 잘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라’라고 알고 있어. 전혀 내 이름대로 살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난 나름 내 인생에 만족하며 지내는 중이야.
형원이라는 이름이 생각보다 흔하진 않은 것 같아. 내가 한국에서 생활한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일 수도 있지만, 일단 난 지금까지 살면서 내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을 직접 본 건 중학교 때 내 한문 선생님 한 분뿐이었어. 그때 선생님이 날 부르시면서 뭔가를 시키실 때마다 ‘어우, 내가 내 이름 부르니까 이상하네’ 하셨던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어. 뭔가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그때 이래로 왠지 한문 선생님이 내게 뭔가 잘 시키지 않으셨던 것 같기도 해. 최근 들어서 아이돌 한 분이 나랑 이름이 같다는 걸 알게 되긴 했다. 몬스타엑스에 채형원이란 분이었던 거 같은데 잘생겼더만.
이제 내 영어이름이 생기게 된 계기에 대해 얘기해 볼게. 처음 영어이름이 생긴 건 초등학교 2학년 때 첫 영어학원에서 학원 선생님이 지어주신 거였어. 사실 내 첫 영어이름은 Kelvin이 아니었다? 내 첫 영어이름은 ‘Henry’였어. 그런데 그 이름으로 학원을 다니던 중 다른 영어학원에서 우리 학원으로 전학을 온 학생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이미 영어이름이 있었어: 해리포터 할 때 그 ‘Harry’. 그렇게 선생님이 몇 번 수업을 하시다가 나랑 그 친구 이름, Henry랑 Harry가 헷갈리기 시작하셨나 봐. 그래서 어느 날 그냥 내 영어이름을 Henry에서 전혀 다른 Kelvin으로 바꿔버렸어. 그리고 그때부터 쭉 내 영어이름은 항상 Kelvin이었지. 난 그때 어려서 그런 것도 있고 영어 이름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어서 그냥 ‘아 내 이름이 바뀌었구나’ 하고 말았어. 어차피 그때는 영어이름을 영어학원에서 말고는 쓸 일이 없었으니까. 허나 그땐 몰랐지 훗날 그 이름이 내 법적 이름이 될지.
그래서 난 프랑스에서 살 때도 Kelvin이란 이름을 사용했어. 처음에는 친구들이랑 선생님께 형원이란 이름으로 소개했었지. 근데 형원처럼 받침 있는 이름들이 서양 사람들에겐 발음하기가 어렵다 보니 단 한 번도 제대로 형원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 그때는 이상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얘기하는 게 듣기가 왠지 모르게 거북했어서 영어학원에서 말고는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던 Kelvin을 부활시켜 프랑스에 있는 4년 동안 내 정체성이 되어줬지. 처음에 친구들에게 Kelvin이라고 불릴 땐 뭔가 어색했는데 그래도 4년 동안 이 이름으로 지내면서 나 자신이 Kelvin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위화감이 사라진 것 같아. 형원처럼 Kelvin도 진짜 내 이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느껴봤어.
미국에 왔을 땐 처음부터 외국인들에겐 형원이라고 소개할 생각조차 안 했어. 바로 Hi, I’m Kelvin으로 시작했지. 또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고, 설명해 줘도 이상하게 얘기하고 이러는 게 난 싫었어. 이때쯤 그 얘기를 처음으로 들긴 했다. 몇몇 한국 2세들이 영어이름을 만들지 않고 본인의 한글 이름을 자부심 있게 생각해서 어려운 발음 끝까지 설명해 주고 결국엔 친구들이 잘 발음하게 됐다는 얘기. 실제로 내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이 있는데, 난 내 한글 이름에 자부심이 없어서 영어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던 건 아니야. 그저 아주 어렸을 때 우연한 기회로 영어이름이 생겼고 프랑스에서 그 이름을 오래 듣다 보니 그 이름도 정말 나인 것 같은 느낌이 있으니까, 난 형원이나 Kelvin이나 상관없었던 게 제일 큰 이유야. 그리고 서양에선 Hyungwon보단 Kelvin이 당연히 접근성이 좋기도 하고. 오히려 대학생 때 쭉 오랫동안 Kelvin이란 이름으로 불리다가 어쩌다 한번 한국 친구에게 '형원아!'라고 불릴 때면 왠지 모르게 설렜던 적이 있기도 해 (아, 당연히 이성인 친구가 불러줬을 때 ㅋㅋㅋㅋㅋ). 이건 내가 내 한글이름을 아주 좋아하고 정이 있다는 뜻 아닐까?
신기한 건 한국에서 형원도 그렇고 여기서 Kelvin도 그렇고 흔한 이름이 아니야. 미국에 지금까지 10년 넘게 살고 있는데 아직 직접 다른 Kelvin을 만나보지는 못했어. 이게 작은 자부심이라면 자부심이랄까. 좀 흔치 않은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게 나는 꽤 맘에 들어. 대신 다른 사소한 문제점이라면 Kelvin과 Calvin의 발음이 정말 유사하다는 거야. 마치 한글에 'ㅐ'랑 'ㅔ'처럼. 그리고 미국에서 Calvin이란 이름은 아주 흔해. 유명한 Calvin Klein이라는 브랜드도 있어서 Clavin에 대한 인지도가 높은 편이라 내가 Kelvin이라고 소개할 때면 많이들 Calvin으로 오해하곤 하지.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방법 하나는 온도 Kelvin이라는 부가설명을 붙이는 거야: "Hi, I'm Kelvin, like the temperature". 이과생들은 기억하려나? 중학생 때 절대온도라는 개념을 배우잖아. 그 기호가 Kelvin이지. 섭씨가 Celcius인 것처럼. 이런 부가설명은 귀찮거나 하진 않아. 사람들이 이름을 이상하게 발음하는 게 아니고 그저 스펠링의 차이를 헷갈려하는 거라. 그리고 절대온도 켈빈이에요라고 소개했을 때 상대의 그 아하! 하는 표정을 보는 게 꽤 재밌기도 해. 가끔가다 상대방이 먼저 '절대온도 Kelvin인가요?'라고 물어보면 나는 '오~~ 뭘 좀 아시네요!' 하고 받아치기도 하지.
이제 Kelvin이 내 법적 이름이 된 지도 거의 3년이 돼 가네. 미국에는 미들네임이라는 게 있잖아? 형원이란 이름도 내 미들네임에 넣어놨어. 마지막으로 한국에 다녀왔을 때 내 일기에 '미국에선 Kelvin이란 옷을 입고 내 자신을 발전시켜 가고 한국에 왔을 땐 형원이란 옷으로 갈아입고 학창 시절 나를 마주하겠다'고 썼던 적이 있어. 둘 모두 나지만 각기 다른 환경에서 다른 이름으로 경험한 것들이 하나로 합쳐져 나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게 내가 맘에 들어하는 자랑스러운 정체성 중 하나야.
빌리어코스티 - 소란했던 시절에 中
"그 소란했던 시절에 그대라는 이름"
DOKO - My Star 中
"고요히 잠든 이 밤 빼곡하게 쌓인 둘만의 추억이
흐릿한 유리창에 홀로 써 내려가는 너의 이름"
다들 '이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 아니면 기억 속 저편에 잊혀져 있던 사람이라던가? 만약 있다면 그 사람에게 새해 인사 한번 간만에 건네보는 건 어때? 일단 나부터 시작하려고.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