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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범 Nov 23. 2018

테이트 모던은 그곳에 솟아 있더이다

무엇이든 알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소프트 아이스크림 머리를 한 뉴트론이 참 부러웠다.


열 살.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달려가 TV를 틀었다. <천재소년 : 지미 뉴트론>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꼬마는 동년배 천재 과학자에게 매료됐다. 소프트 아이스크림 머리를 한 뉴트론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 친구도 나와 비슷한 고충들을 겪고 있었다. 초등학교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시시콜콜한 문제들. 단, 한 가지가 달랐다. 푸른 눈의 미국 소년은 똑똑했다. 기상천외한 -실제 과학과는 거리가 먼- 발명품을 개발해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그중 제일은 ‘먹는 책’이다. 지식이 담긴 책 모양 껌이다. 그는 껌으로 고전을 단번에 이해했다. <돈키호테>나 <로미오와 줄리엣> 껌을 씹곤 극 중 캐릭터를 쉽게 흉내 냈다. 그가 참 부러웠다. 


‘먹는 책’은 훈련소 생활 무렵 다시 떠올랐다. 그 껌이 필요했다. “나는 말이야…”로 시작된 동기들의 이야기에 승선하고 싶은 마음이 짙었다. 훈련소 동기들은 스무 해 정도 되는 당신의 삶을 읊어 댔다. 수사자가 갈기를 멋들어지게 털어내듯, 인생과 생각을 뽐냈다. 평생 처음 본 수컷들의 모임이니 그럴 만도 하다. 과거를 공유하는 시간은 훈련소 기간 중 꽤나 주요했다. 시장경제를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자랑이 서열과 권력을 재단했다. 동기들은 상대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그들을 견제하고 자신의 지위를 굳건하게 쌓아 올리려 무용담을 늘어놨다. 모두가 비공식 전문가들이었다. 당시, 중대장 훈련병(전교 회장 격이다)이었지만 자랑할만한 거리가 없으니 모든 말에 긍정하고 입을 닫는 날이 잦았다. 그 책, 참 필요했다. 


책 처럼 보이지만, 사실 껌이다. 껌을 십으면 책 내용이 그대로 뇌에 입력된다.


복학하니 앎의 개벽이 열렸다. ‘인스턴트 아티클’이나 ‘카드 뉴스’로 표방되는 스낵 컬처가 소셜 네트워크를 타고 퍼졌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쉽고 빠르게 접할 기회였다. ‘3분 순삭! 3분 만에 알아보는 마케팅 원론’이나 ‘매력적인 PPT를 만들기 위한 방법 5가지’ 등 요약글과 리스타클이 대세를 이뤘다. 여기에 수업에서 다루는 내용의 폭도 1학년 때와 비교해 넓어졌다. 일반교양과 개론에서 획기적으로 깊어지지는 않았지만 보다 많은 양을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문화를 키워드로 지역을 재생하고 새로운 마케팅 방법론을 제시한 사례들을 수차례 배웠다. 새로운 이야기로 머리가 충만해진 시기였다. 분야를 막론하고 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가난한 자부심이 생긴 거로 기억한다. ‘테이트 모던’을 만난 시기도 이 즈음이다.


테이트 모던은 지역문화와 산업유산이 주제인 수업에서 배웠다. 이 미술관에 한 학기 중 1시간 정도가 할애됐다. 글로 읽은 테이트 모던은 다음과 같다.


▶ 화력 발전소를 재활용한 미술관
▶ 21세기 영국의 화려한 부활을 꿈꾼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일환
▶ 프로젝트를 주창한 이는 마거릿 대처에 이어 개혁의 바통을 이어받은 존 메이어 총리
▶ 미술관 현상 공모에는 ‘헤르조그&드 뫼론’의 시안 당선.
▶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불문율을 깬 레노베이션
▶ 가로 150m, 5층 높이 적색 벽돌 건물, 99m 크기 굴뚝을 원형 그대로 보존.
▶ 내부 터바인실도 터바인 기계만 제거. 곳곳에 박힌 H형 철제 빔과 천장 크레인도 보존
▶ 미술관 주변 상권 활성화


기억력이 비루해 이게 전부다. 한데 얕은 기억 조각이지만, 그 티끌로도 적색 벽돌 미술관에 마음이 갔다. 지식이 흥미가 되고, 흥미가 팬심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대화 주제에 서양 섬나라가 등장하면 어김없이 테이트 모던을 꺼냈다. 돌이켜보면 부끄럽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다.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연도 없는 섬나라 예술-발전소를 홍보해댔으니 말이다.  


사실상 규모에 먼저 압도 당한다. 정말이다.


결국 런던에 왔다. 세인트 폴 성당의 시선은 밀레니엄 다리를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그 시선의 끝자락에 테이트 모던이 자리했다. 테이트 모던은 그곳에 솟아 있더이다. 그 벽돌 건물은 통째로 나에게 다가왔다. 거대한 오크통이 굴러오듯 눈으로 덤벼들었다. 글 속 테이트 모던은 분해돼 있었지만, 실제는 달랐다. 감당할 수 없는 묵직한 무언가가 등장해 먹먹했다. 거대한 파도가 한차례 지나갔다. 수업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이다. 건축물이 담은 의미보다 그 존재감이 나를 먹었다. 수업과 글에선 느끼지 못한 감상이다.


파도가 잦아들자 작은 것들이 나타났다. 아이들의 웃음. 적색 벽돌과 철근이 자아낸 향. 입구에서 터빈룸으로 흘러 들어오는 런던의 겨울바람. 거대한 유조선 정도는 거뜬히 들여보낼 정도로 높은 천장. 그 측면으로 내리는 회색 볕. 


테이트 모던을 2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만큼 시간이 걸렸다. 나는 몰랐던 거다.

10층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본 런던이다. 날이 궃지만 어쩌겠는가. 런던이니.


그간 테이트 모던을 쉽게 취했다. 수업 한 시간과 비슷한 정도의 중간고사 대비 공부로 거대한 발전소를 머리에 담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착각이었다. 한편으론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자원을 소비하지 않고 원하는 바를 얻고자 욕망한다. 그리고 이 메커니즘은 사피엔스 종을 지구 제1종으로 성공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 조상이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들이며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 방법을 깨닫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수렵생활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투자 대비 효율을 극대화하고 싶은 마음은 진화의 핵심이다. 


인류학에서 사회철학으로 넘어오면 시각이 사뭇 달라진다. 빠르고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것들에는 이미 아우라가 증발해 있다. 쉽게 말하면 그 만이 품고 있는 느낌이나 감동이 없다. 쉽게 취할 수 있는 인스턴트 지식에서 주제가 함유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카드 뉴스나 리스타클에서 진정성과 영감을 받기 어려운 이유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아우라를 상실한 복제 시대를 소논문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진단한 대로다. 아우라는 예술작품을 원본 소비한 특정 부류에만 허용된 셈이다. 그 지식을 ‘제대로’ 얻기 위해선 수년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니 말이다. 지식을 얻기 위해 수년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희망적이진 않지만, 지식 공유의 황금시대를 사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손쉽게 얻은 지식은 패션 지식이다. 문화적 구별 짓기로서 패션 지식을 애용하면 최악이다. 사고 과정을 성숙시키기보다는 도구적 지식인 셈이다. 그 지향점이 상대와 나를 나누고 경제 등의 권력을 취하기 위해서라면 더 위험하다. 단순 갈증을 해소하고 싶다면 인스턴트 지식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과도한 시간과 노력을 지출하는 건 낭비다. 그 앎을 제대로 파고 싶다면 마시멜로를 맛보기 보단 탐구가 필요하다. 


그러고보면 지미 뉴트론은 먹는 책을 남용 해 부작용을 겪었다. 


밀란 쿤델라의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일부를 발췌해 글을 맺는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버려 지상의 존재에게서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중략)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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