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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군 Jan 21. 2021

파리

유럽 : 파리

        파리 영사관에서 파란색 긴급여권을 만든 우리는 그제야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별의별 경험을 다한다. 긴급여권 커버는 코랄 블루다. 우리 초록 여권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편도 한 번만 사용 가능한 단수여권이라는 설명을 영사관에서 덧붙여 주었다.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나는 이후로 아우터 안주머니에 전재산인 스마트폰을 깊이 간직한 채로 다녔다. 사진을 한 장 찍어도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사진을 찍고는 누가 볼 세라 다급히 다시 주머니로 넣곤 했다. 물론 아내에게 카드와 현금이 있었기에 다행이지만, 내가 더 이상 뭔가를 잃어버리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더구나 프랑스는 소매치기의 천국이라는 명성을 이미 들은 터였다. 셀카봉도 써서는 안 된다고 했다. 셀카를 찍고 있으면 그대로 빼서 훔쳐간다는 이야기였다. 


        해질 무렵 숙소에 도착했다. 거실에 누워 창 밖으로 잠에서 깨도, 잠이 들기 전에도, 밥을 먹다가도 에펠탑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허니문을 위한 수많은 여행지가 있다. 최고급 시설과 편안함을 보장받는 휴양지들도 있다. 적어도 우리에겐,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에펠탑을 보며 보내는 시간과 그 낭만은 어느 휴양지도 대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에펠탑 전세 내기


        해가 아주 지고부터는 조명의 힘을 얻은 에펠탑은 더 멋지게 빛나기 시작한다.

와인을 먹을 줄 몰랐던 촌뜨기 시절


        우리는 간단한 짐 정리만 마치고 저녁식사를 위해 천천히 시내로 걸어 나와 지하철을 탔다. 내가 직접 여는 지하철 도어가 무척 생소했다. 몰랐으면 못 내리고 종점까지 가야했을 지도. 파리는 무엇보다도 맛집의 천국이다. 유럽 여행 중 먹어 본 음식들 중 가장 맛있는 것들은 대부분 파리에 있었다. 도착한 날 저녁에 찾은 곳은 스테이크 가게였는데, 내 기억으로는 이 집이 한 접시 먹고 난 후에 더 시키면 더 주는 곳이었다. 무제한이었는지까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니스에서부터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힘겹게 찾아온 파리였으므로 우린 또 무척 허기진 상태였을 것이다. 이쯤 되니 힘들어서 허기가 졌는지, 그냥 우리가 먹보였는지 혼란스럽긴 하다. 고기가 두툼하진 않았으나 부드럽게 잘 익혀서 나왔고, 무엇보다도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스테이크 위에 뿌려진 소스였다. 녹색 소스. 정점의 마법 소스였다. 아마도 나는 이것을 먹고 두어 접시 더 시켜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가게부터 나는 찾는 식당마다 하우스 와인을 한 잔 씩 시켜먹게 되었는데, 뒤늦게 와인의 그 쌉쌀하면서 달짝지근한 맛에 빠져들었다. 소주가 전부인 줄 알고 고집하며 살았던 지난 날을 후회했다. 배불리 스테이크를 먹고 천천히 걸어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갈 때는 지하철을 탔지만, 걸어도 괜찮을 거리라 생각했는지 돌아오는 길은 같이 손잡고 걸었다. 


         저녁 공기는 조금 쌀쌀했지만, 사이좋게 돌아오는 가벼운 발걸음이, 함께 맞추며 걷는 발걸음이 좋았다. 연애하던 시절에도 우리는 항상 발맞추어 걷는 걸 즐겼는데, 시간이 훌쩍 흘러 어느새 결혼은 하고, 쎄느 강변을 걸어, 전구들이 반짝이는 회전목마를 지나, 에펠탑까지 함께 걸었음은 지금 생각해도 꿈같은 일이다. 주기적으로 시간을 두고 반짝이는 에펠탑의 하얀 불빛에 우리 설레는 마음도 비쳤다.

 

우리 마음처럼 빛났던 에펠탑


        다음 날 우리는 쎄느강으로 나와 유람선을 탄 것을 시작으로, 해가 질 때까지 온종일 파리 시내를 돌아다녔다. 아침엔 날이 좀 흐렸고, 10월 말 조금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지만, 외투 한 벌이면 가뿐하게 돌아다닐 만했다. 작은 공원에 들러 산책하기도 했고, 작은 식당을 찾고 찾아 달팽이 요리를 먹기도 했다. 그 유명한 루이비통이 있다는 상점 거리를 걸었고, 레페토 매장에 들러 아내의 구두도 한 켤레 장만했다. 또 어느 유명하다는 약국에 들러 화장품과 약을 샀던 것도 생각이 나는데, 참 신기했던 게 꽤나 큰 규모의 가게 안 절반 이상은 한국인이었다. ‘어딜 가면 이건 꼭 사야 해!’ 하는 한국인의 열정은 정말 인정해줘야 한다. 이제는 여행 문화의 한 부분으로 인정해야 할 듯하다. 유럽 여행 중 한국인과 자주 마주치긴 했지만, 그렇게 많이 모여 있는 걸 본 건 그 가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콩코드 광장에 들러, 근처 한 카페에 커피를 마셨던 것도 무척 기억에 남는다. 이 곳의 식당과 카페들은 의자가 길을 바라보고 앉게끔 되어 있어서 마치 길과 건너편을 바라보는 관객처럼 나란히 앉아야 한다. 사실 좁은 인도의 구조 상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일 수도 있으니, 따지고 보면 그리 특별할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내와 나란히 앉아서 한숨 돌려가며, 도란도란 이야기해가며 커피 한 잔에 멋스러운 고딕 건축물, 오가는 사람들과 차, 하늘을 보는 것이 좋았다. 특히나 우리는 연애할 때부터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마주 앉지 않고 나란히 앉는 것을 즐겼는데, 그래서인지 이국 땅에서 그렇게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따금씩 하늘에 그리는 비행기의 둥글둥글한 꼬리 구름을 멍하니 보는 게 좋았다. 니스에서도 그랬고, 프랑스에서 유난히 그 꼬리 구름들을 많이 봤던 것 같다. 그 흔적들을 보고 있자면, 저 많은 비행기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싶다. 그러다 보면, 일로, 여행으로, 가족을 만나기 위해, 각자의 이유로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 나도 있음을 실감하게 해 주어 서일지, 나는 유난히 하늘에 남아 있는 비행기들의 흔적을 보는 걸 좋아한다. 이 구름들은 처음엔 하얗고 진하게 남아있다가, 점점 옅어지며 흩어져 사라지니 하늘이 지저분해질 걱정도 없고 말이다. 


마차와 하늘


        저녁이 되도록 우리는 시내를 다니다가 개선문 근처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러고 보면 그 날 저녁 즈음에 오랜 걸음으로, 또 아침엔 없었던 짐도 생기고 지쳐서 내가 잠시 말이 없었던 시간이 있었던 것 같지만 기분은 금방 풀렸다. 아마 함께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여행을 가면 참 많이 걷는다. 여행이란 게 당연히 많이 걷는 거라고들 말하지만, 아마 나 혼자였다면 중간에 일정을 중단하고 숙소로 돌아와 쉬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저기 여행하며 매일 2만 보 가까이 걸어온 것은 함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여행도 여행이지만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재미있고 좋아서, 이렇게 오래 걸었다는 걸 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어찌 저찌, 유럽을 다녀온 후로 4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당장은 여행을 떠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 잠깐 찾아왔지만, 여행이 아니더라도 부족한 내 인생 힘든 순간순간을 잊고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게 해 주는, 또 그 한 걸음 한 걸음 발 맞추어 걸어주는 아내에게 감사하다. 유럽은 과거의 일이 되었고 시간은 계속 흐르지만, 이 책을 쓰는 오늘 하루도, 우리 함께 하는 인생도 모두 신혼여행의 연장선임을 믿는다. 


해 지던 개선문

        개선문 근처 해산물 가게에서의 저녁식사를 끝으로 우리 신혼여행의 마지막 밤은 마무리됐다. 아쉬운 마음에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에펠탑 근처를 한 번 더 산책하고, 짐을 싸 나왔다. 사실 그 와중에 기가 막히게 스벅을 찾아낸 아내 덕에 커피를 한 잔 사 마셨던 것 같다. 글로벌 기업 스타벅스. 위대하다. 그렇게 샤를 드골 공항으로,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OZ502편. 이제 정말 우리 둘이 꾸려가는 실전 인생으로.


한국에 돌아오던 날 아침


        여담이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어느새 유럽은 우리 신혼의 시작으로, 이제는 내 일이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유럽을 더 좋아하게 됐다. 아빠의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기 짝이 없어서, 사진 한 장이라도 더 찍어 놓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준이의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가는 게 아쉽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준이가 빨리 커서 우리 식구 다 데리고 길게 휴가 내서 유럽에 빨리 가 보고 싶어진다. 함께 걸으며 느끼고,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귀여운 식구가 하나 더 늘어난 것도 감사한 일이고, 준이에게 즐거운 여행의 동반자이자 벗인 아빠가 되고 싶다. 

        막연한 아빠 욕심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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