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ctoria and Albert Museum: 엄마 아빠 고마워요.
런던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순간이 있었다. 앞으로 몇 년이 흘러도 잊지 못할 것 같은 그 순간은, 어떤 특별한 날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 있었다. 지하로 다니는 튜브 대신 2층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관광객 모드로 런던 시내를 누빌 때, 조깅하다 힘들면 앉아서 쉴 수 있는 공원과 벤치가 눈 앞에 바로 있을 때, 자전거를 타고 있는 아이가 뒤에서 벨을 울려서 쳐다봤더니 "Sorry"라는 인사와 함께 윙크할 때. 영국인의 시선으로 봤을 땐 특별함이라곤 하나도 없을 테지만 내게는 20년 넘게 겪어온 똑같은 일상을 벗어난 시간이었기에 특별하다. 빅토리아앤알버트 뮤지엄도 나에게 그런 곳이다.
하이드파크를 한참 걸어 피곤한 상태에서 들어갔는데, ㅁ자 구조의 미술관 한가운데 있는 정원이 내 피로를 녹여주었다. 벤치에 자리가 없어도 잔디밭이나 분수대 모서리에 철퍼덕 앉아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다. V&A 뮤지엄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쉼터였다.
전시를 보고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어도 된다. 런던 시민들은 언제든 날이 좋을 때 와서 편하게 쉬다 가면 된다. 그러다 전시가 궁금하면 둘러보면 되고, 샵에서 사고 싶은 것이 있다면 들리면 되는 것이다. 웅장하고 근엄한 외관과 달리 문턱이 매우 낮다.
무료로 개방된 전시들도 관람할 가치가 높지만, 유료 특별전도 방문율이 높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삼청동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MMCA)과 서울시립미술관에 자주 가는데, 런던의 미술관들과 굳이 비교하자면 방문객의 연령층이 달랐다. 우리나라는 젊은 층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런던은 가족단위, 노인 방문객도 많았다. 그만큼 미술관에 가는 것이 누구에게나 일상적인 일이라고 느껴졌다. 미래에 (혹시라도) 가족을 꾸리게 된다면 혹은 친한 친구가 아이를 낳아 귀여운 조카가 생긴다면 미술관이라는 곳을 자주 보여주고 싶다.
작년 9월, 일기예보를 보니 그 주말을 기점으로 갑자기 기온이 확 떨어질 예정이었다. 런던에서는 해 뜨는 날 하루하루가 천금같이 소중해서 집에서만 보낼 순 없었다. 급하게 예약을 하고 KF94 마스크로 중무장한 채 V&A에 갔다. 전시를 다 보고 정원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내 어린 시절을 더듬어보았다. 우리 부모님은 미술관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나를 위해 시간을 내고 장거리 운전을 하며 여기저기 데려가 주셨다. 그중엔 박물관도 있고, 유적지도 있고, 바다도 있었다. 아마 그 기억과 경험들이 어른이 된 지금의 취향과 취미를 만든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설명하기 좋아하시는 아빠 때문에 나도 지금 브런치에 내 이야기를 마구마구 올리고 있다.
V&A는 저 멀리 영국에 있지만, 그곳에서 산 에코백과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은 나와 함께 있으니 이렇게 추억하면서 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