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읽는다
나는 책을 읽는 행위가 구원이나 치유와 관련된 절실한 무엇이라고 믿지 않는다. 책을 읽음으로 내 지혜의 키가 쑥쑥 자란다거나 세상을 보는 안목이 훤해질 거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책을 읽은 자들의 힘으로 세상이 나아졌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책이 세상에 기여하는 방식이 있다면 가령 “소방학 개론”이나 “임상내분비학”, “건축설비설계” 같은 책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통일한 진秦의 영정이 불태우지 않은 종류의 책들 말이다.
나는 고대 중국 철학자들의 글을 읽는다. 그들 중 일부는 진시황이 철저히 불태웠더라면 읽을 수 없었을 것들이다. 그들의 글은 늘 의심스럽고 먼 풍문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수백 광년 떨어진 별들이 내게는 더 확실해 보인다. 공자의 불행과 맹자의 울분은 남의 일만 같다. 공자, 맹자를 주석하는 자들의 글은 더욱 가관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들의 주장은 바람을 붙잡아 벽에 걸려는 것처럼 가망 없어 보인다. 그 벽에 갇혀 나는 낑낑대고, 썼다 지우고, 결국 내던진다. 그럴수록 나는 기계공학이나 생화학 같은 것들을 공부했어야 했다는 미련에 몸을 떤다.
나는 읽음으로써 자기모멸과 불안을 잠깐이나마 잊고 싶을 뿐이다. 나는 태극이니 음양이니 하는 고대 중국철학자들의 형이상학이 이 세상을 진정으로 설명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무의미를 견디는 방식으로, 삶의 허무를 직시하는 이유로 읽는다. 그 무엇도 숭배하지 않고, 그 무엇도 경멸하지 않으며,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간신히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