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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 Aug 30. 2023

후천성 알레르기

전신박피 시술 후의 감내하기



기승을 부리던 모기들이 슬슬 어디론가 사라졌을 때 즈음 간지러울 일은 거의 없어졌고 선천성으로 가지고 있는 알레르기에 반응하거나 아니면 내가 인지하는 데에도 참고 감내하는 것 외에는 나를 괴롭히는 일은 도무지 있지 않았다. 가끔 지나친 먼지에 재채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잦지는 않았다.


언젠가 길가 벤치에 앉아 따뜻한 밀크티를 마실 때의 일이었다. 적당히 잔이 미지근해져 밍밍해진 밀크티보다는 주위의 풍경이 더 맛있어졌을 무렵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다리를 비비고 있었고 차마 만질 수 없었던 나는 간지러울 것인가 혹은 바라만 보며 좋아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사람은 대체적으로 인간 외의 것들에 대해 딱히 생각의 주체를 건네지 않는다. 그것이 애착이 있는 물건이던지 혹은 반려동물이던 지간에 그러한 경우는 많지 않다.


작은 털들에 반응해 알레르기가 심했던 나는 동물은 물론 복숭아나 애플민트의 잔털까지도 손을 댈 수 없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유독 좋아해 약을 먹어도 다음날 얼굴이 붓는 한이 있더라도 가방에 항상 구비된 약을 섭취하곤 가끔 욕심내어 만지는 편이었다.


그들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 건 유독 컨디션이 좋지 않아 도저히 만질 수 없는 날에 마침 운 좋게도 나에 대한 생각이 비워져 주체가 그들에게로 넘어간 듯싶다.


그들도 인간 알레르기가 있지만 감내하고 우리에게 살가워하며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나중에 후천적으로라도 알레르기가 발생하여 몸을 내 다리에 비벼 좋아하는 감정과 간지러움을 동시에 해결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곤 알레르기라는 개념을 넓혀 간지러움을 예견하지만 하고 싶은 것 그리고 삶에 지장이 가지 않는 정도의 거리감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던 간지러울 거리들은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딘가에서 듣기로는 나이가 들면 점점 심해진다고는 하는데 어느 정도 동감하는 바이다.


반대로 간지러움을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꽤나 많은데 예를 들어 길을 걷다가 눈을 마주치자마자 몸을 외로 꼬며 예쁘게 걸어오는 고양이라던가 혹은 몇 달 전부터 예약해 둔 레스토랑의 코스요리 메뉴판을 유심히 읽어보지 못해 이미 접시 위에 올라가 있는 새우요리 정도의 경우는 감내하는 편이다.


그 외의 예시로 감내하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 간지럽히는 꽃가루 같은 경우도 있는데 꽃을 사는 것과 주는 것,  어찌 되었든 꽃의 색감을 맞춰 아름답게 배치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어느샌가 꽃가루만 날리는 봄이 되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부어있었다. 벚꽃놀이는 나에겐 정말 큰 결심이 있어야 할 정도로 그렇다.


다만 간지러운 건 언젠가 해소가 되고 내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는 수준이라면 어느 정도 감내하고 견뎌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간간히 타의에 의해 간지럽혀지는 것들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알레르기는 나도 모르게 생겨나고 부어있다.


독이 든 성배를 마시라는 뜻은 아니다. 견디기 힘들고 그게 심한 정도의 간지러움이라면 기피하고 감내하지 않는 것이 맞다. 나 또한 술버릇이 고약한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


가끔은 공적인 것과 집단이라는 특성에 섞여 들어오는 심각한 정도의 간지러움도 있는데 그저 산이나 바다에 사는 독한 모기에 물려 많이 붓고 피도 좀 나는 상황정도로 생각하곤 부기가 빠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만 계절은 지나 모기는 사라질 것일뿐더러 내가 긁거나 물린 부위를 얼른 해소하려고 긁어 애쓰지만 않는다면 흉터로 남겨질 일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질긴 피부를 가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나는 질긴 피부를 가지고 있기에 무언의 부드러움이나 맞닿는 살가움에도 무던하게 반응했고 자극적이지 않으면 반응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예민하게 느끼려 내 피부에 닿는 느낌보다는 대상이 나에게 하려는 것에 대한 예측을 하며 눈치를 보게 되었고 상대방이 준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나의 예민한 신경과 더해져 변질된 답변을 줄 수밖에 없었다.


탈피를 하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자의와 타의가 반반 섞여있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정확한 비율은 사실 모르겠다. 껍질을 깨고 나오는 데미안의 서사도 아니고 코트를 한 겹 벗는 계절감이 느껴지는 내용도 아니지만 가장 비슷한 표현은 '전신 박피시술날 기록에 없는 한파경보' 정도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나 또한 탈바꿈하는 것에는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 묵직한 계기가 있어야 할뿐더러 나의 경우에는 나뿐만이 아닌 타인까지의 경우가 얽히고설켜 있어 이 껍질을 달고 살다가는 언젠가 껍질이 썩어 냄새나고 물에 젖어 물때가 끼겠다는 생각에 성급히 바뀐 걸지도 모르겠다.


다만 고양이를 만질 때에는 장갑 낀 손보다는 맨손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 있었다. 물론 더 간지럽고 힘들겠지만 고양이도 부드러운 손을 더 좋아할 것이기에 간지러움을 감내하고 두껍고 질긴 피부를 벗겨내는 시술을 결정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또다시 꽃밭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느 정도 감내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꽃은 필 것이고 나는 간지러워 눈을 못 뜨겠지만 아름다워 눈이 부시다는 표현을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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