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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 Oct 04. 2023

이웃집 앞 이입방지턱

방문 시 과몰입방지



영화관에는 항상 품 안에 노란색 팝콘을 한 통 들고 간다. 늘 시각적인 예술작품을 보자면 감상에 젖거나 혹은 부정하고 힐난하면서 머릿속을 잡생각으로 가득 채우는 시간에 행복감을 가지곤 했다.


적어도 최신식 영화관이 나타나 그들의 숨소리가 발끝에도 들리고 영상에서 보여주는 첫사랑이 성공하는 모습에 가슴이 달큰해지기 전까지는 그렇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를 꽤나 즐겨보는 편이었고 영화를 보는 동안 팝콘을 입에 반복적으로 넣는다는 게 잊혀 어느샌가 바닥에 손이 닿아 단단한 옥수수 씨앗이 나도 모르게 손끝에 닿을 때면 '이 작품은 몰입도가 있었으며 좋은 영화였다.'라고 정의했던 적도 있었다.


때로는 나와 맞지 않아 보는 내내 실망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수많은 질타와 원망을 하며 실눈을 뜨고 스크린을 흘겨볼 때도 있지만 영화선택의 주체는 언제나 나의 몫이라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감상이 아닌 정보전달이겠거니 하며 다큐멘터리 시청의 자세로 고쳐 앉는다.


영화보다 팝콘을 먹는 게 더 맛있어서 어느샌가 팝콘을 먹는 행위에 영화가 지워질 때즈음엔 듣기 싫은 소음과 번쩍거리는 스크린에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카락대신 팝콘을 쥐어뜯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한 움큼씩 쥐여 욱여넣다 참을 수 없을 땐 영화가 끝나기 전에 나가버리곤 한다.


당시에는 영화라는 것은 나에게 원본의 책을 갖가지 색연필로 필사한 후 그 글자들을 가지런히 모아 그라인더에 정갈하고 곱게 갈아 필름에 덕지덕지 붙여 반복운동하는 영상기의 도르래에 밀어 넣어 보여주는 심리테스트용 컬러링북 정도였다.


눈앞에서 간지럽게 흩날리거나 약간의 상상력을 더하자면 어딘가로 흘러가서 싹을 틔우겠다는 망상을 할 수 있는 움직이는 피사체였지만 음향기술과 영상기술의 발달로 나는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했고, 의자의 진동이 흔들리면 나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흔들리는 의자에 붙잡을 수 있었던 건 옆자리의 누군가도 팔걸이도 아닌 품 안에 꼭 안고 들어간 팝콘이었다. 영화에 이입되어 같이 요동칠 때는 팝콘을 입에 욱여넣어 어느 정도 억제제의 역할로서 활용했다. 효과는 미비했지만 그래도 비빌 언덕이 있다는 것과 입에서 단맛이 나는 대신에 짭짤한 짠맛이 돈다는 것이 아직 내가 현실에 있다는 자각을 하게 해주는 심벌이었다.






이입이란 한여름 습기에 빌어 약지 손가락 끝에 맺힌 물 알갱이로 한참을 문질러 문풍지에 구멍을 내어 그 건너를 비집고 들어가 나와 같은 크기의 구멍을 내어 연결되는 것이다.


나는 왜소하고 낮았기에 손가락만 한 구멍에도 충분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비집고 들어가는 마찰감도 무언가가 짓이겨지고 찢기면서 생기는 파공음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이입의 과정에서 나의 위치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구멍을 통해 들어온 곳이 나의 감정인지 나온 곳이 상대방의 입장인지가 불분명해졌고, 결국은 되돌아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꽃가루가 잔뜩 묻은 꿀벌의 무거운 엉덩이처럼 노랗게 물들어버렸다.


양측에 동일하게 물들어 버린 노란색의 가루들은 구멍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황사와 꽃가루로 나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노란 화원에서 지내던 꿀벌들은 구멍바깥의 세상에서 부는 매캐하고 무거운 황사가 털에 묻어도 노란색은 꽃가루 이외에는 모르기에 행복해했다.


아마 황사가 폐 깊숙이 자리해 입안이 서걱거릴 때에도 그저 가장 좋아하던 노란 가루에 둘러싸여 죽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꼭 구멍을 지나가야 한다면 작은 화분에 꽃을 세 송이 정도 옮겨 품에 안고 건너편으로 넘어가곤 한다.


그래야만 눈앞의 아득히 드리운 노란 분말에 취해 공간을 망각했을 때 지금 몸에 덕지덕지 붙은 색이 품 안에 있는 화분에 있는 꽃들의 색과 같은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혹여나 너무 깊게 자리해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척박해진 바닥을 파고 꽃과 함께 가라앉을 것이다.


요즘도 항상 무언가에 과도하게 이입하려 할 때에는 무언가를 품에 안고 간다.


내 품 안에는 그것이 나임을 알려주는 것이 있고, 품 안의 것들은 신선한 버터에 구워 장난스러운 박수소리에 터져 나온 팝콘처럼 무척 향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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