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루캐리 Jul 09. 2023

브런치에 쓰기에 내 인생 너무 평범한 것 같아

'중간'을 살아가는 서울의 완벽주의자 김 서방

브런치로 구경하는 타인의 인생은 참으로 컬러풀하다. 취미가 있는 사람은 오타쿠 수준의 깊이를 자랑한다. 여행 카테고리에는 이민, n달 살이, 오지와 소도시 여행 이야기가 넘친다. 연애, 결혼, 이혼 이야기는 소싯적 스포츠신문 뺨치는 제목으로 나를 유혹한다. 퇴사한 사람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그들에 비하면 내 인생은 암만 들춰봐도 무색무취인 것 같아 조금 초라해진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중간'을 목표로 삼아왔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인생 말이다. 물론 여기서 넘치지 않는 것보다는 '모자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 가서 뒤처지지는 말자는, 실패하면 안 된다는 딱 한국인다운 생각. 굳이 수치로 표현한다면 정확한 중간 지점은 아닐 것이고, '반의반'인 상위 25%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남을 넘어서지는 못해도 뒤처지지 말자는 뭐 그런 생각인데, 뒤처지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에서 모순이다. 아니, 그보다는 인생을 굳이 시험처럼 여기는 것이 더욱 이상한 일이지만. 하여튼 그렇게 중간을 목표로 살아왔으니 무색무취는 당연한 결과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무언가를 억누르며 살아온 것도 아니고, 죽을 둥 살 둥 버텨본 적도 없다. 그야말로 평범한 중간의 인생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모범생도 문제아도 아니었으나 얌전한 것치고는 공부를 못했다. 꾸준한 학습 자체에 큰 흥미를 갖지 못하면서도 공부를 놓을 만큼 간이 대범하지도 않아 애매한 내신 점수를 손에 쥐었다.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기반으로 하는 중간고사, 기말고사보다는 점수가 바로바로 나오는 모의고사를 선호했다. 조금은 행운을 기대했으나 수능은 더도 덜도 말고 딱 모의고사만큼 나왔다. 실패가 두려워 안전하게 지원한 대학의 영문과에 최초 합격으로 들어갔다. 엄청난 명문은 아니었지만 어디 가서 말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내가 생각하는 딱 '중간'스러운 학교였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강의실에서 끄적인 그림. 2010년 11월 24일.


대학생이 된 나 역시 크게 나대지도 않고 조용하지도 않은 '중간의 아이'였다. 꾸미는 것에 관심이 커졌으나 큰 센스는 없었으며 특별한 취미나 관심사도 없었다. 전공 공부는 아예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엄청나게 재미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수학에 젬병이니 경제나 경영보다는 문과 쪽인데 국어 문법이 재미없으니 국문과는 싫고, 그렇다고 일문과나 중문과는 마이너하다'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으로 선택한 전공이었다. 교양은 더욱 심각했다. 집중하려 노력은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멍때리는 것도 지겨워지면 그림을 끄적였고 대개는, 그리고 결국은 친구의 필기를 복사하는 엔딩이었다.


당연히 스펙도 지지부진했다. 크게 하고 싶은 게 없었다. 배낭여행을 가거나 교환학생을 신청할 여력도 없었을뿐더러, 그 돈을 스스로 벌만큼 간절하지도 않았다. 잠깐 아르바이트를 해 적당한 패키지로 인생 첫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이것저것 해봤지만 연애도 아르바이트도 진득하지 못하고 짧았다. 진로 역시 어영부영 정해졌다. 기업의 홍보대사니 뭐니 하는 대외활동을 몰아치듯 한 후 마케팅과 홍보 부서에서 인턴을 하게 됐고, 그 작고 소중한 경력을 바탕으로 홍보팀에 입사해 어느덧 세 번째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가끔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듣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틀리지 않는 수준, 부끄럽지는 않을 수준,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일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인생, 지금까지 일관되게 추구해 온 '중간'을 사수하고 있는가?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다. 엄청나게 잘난 것도 없지만 크게 못난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적당하다. 적당하기는 하다. 그건 바꿔 말하면, 못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부족한 것이 싫다. 못하는 것이 괴롭다. 잘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눈에 띄게 뒤처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 어떤 분야에서든. '중간'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공포는 나를 지치게 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참으로 피곤한 원동력이다.


개츠비에게 초록빛이 있었다면 내게는 '중간'이 있었다. 오랫동안 바라보며 달려온 그놈의 '중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심리상담을 받던 어느 날, 나의 이야기를 차분히 경청한 상담사님은 조용히 되물었다. '나'는 정말 욕심이 없는 사람인가요?

 

상담의 결론은 완벽과 불안, 그리고 회피였다. 완벽한 것에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기대와 이상, 목표가 높고 엄격하다. 이로 인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커 불안을 느끼며, 목표가 너무 높으니 시작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고 금방 지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성과를 평가절하하기도 하며, 타인에게는 장점을 보면서도 나에게는 단점을 찾는다.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적당히 깔짝거리다' 끝나는 경우도 많다.


살면서 그토록 바라온 '중간'이라든지 '틀리지 않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은 결코 낮지 않은, 오히려 높은 쪽에 가까운 이상이었다. 생각해보면 웃기다. 취미를 꼭 오타쿠 수준으로 갖고 있어야만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오타쿠의 기준은 무엇인가? 나보다 잘 알면 오타쿠인가? 그렇게 치면 전 세계의 1등 오타쿠만이 글을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설령 오타쿠가 아닌 입문자라고 해도 브런치에 글을 쓰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모든 내용이 사실이면 좋겠지만, 조금이라도 틀린 내용을 쓰면 세상이 무너지는가? 이게 박사 졸업 논문도 아니고, 브런치에는 수정 버튼이 있는데?


이러한 생각은 결국 내 인생 전반에 걸친 숙제이자 의문으로 회귀한다. 도대체 왜 남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엄격한 것인가? 참으로 불공평하고 머저리 같은 일이다. 나는 방콕 여행을 여덟 번 다녀왔다. 내 주변의 그 누구도 한 도시에 여덟 번 다녀온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나는 자신 있게 방콕 여행을 많이 다녀왔다고 전시하지 못한다. 어딘가(SNS나 책)에는 방콕에 몇 달, 몇 년씩 사는 사람도 있고, 나보다 많이 다녀온 사람도 있으니까. 이게 무슨 기네스 기록을 두고 다투는 일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 방콕에 세 번 다녀왔다고 하면 나는 분명 아주 크고 적극적으로 호응할 것이다. 나는 방콕에 여덟 번 '밖에' 안 갔지만, 그 혹은 그녀는 방콕에 세 번'이나' 다녀왔으니까.


결국 무색무취의 인생이라는 것도 '셀프 디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이 세상의 수많은 인생 중 진정한 의미의 무색무취인 삶이 어디 있겠는가?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게다가 친구나 회사 동료가 자신의 삶을 무색무취라고 수식하면 나는 조금은 슬프고 화나는 마음으로 부정하며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에게만 이상한 '중간'의 잣대를 들이대니 왜 이리 미련한가. 우리, 아니 나는 천하제일 인생 역정을 선발하는 대회에 출전한 것이 아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최고 수준에 도달하지 않아도 무엇이든 시작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상이 높다는 걸 인정하고, 잘한 건 스스로 칭찬하고, 부족하다면 노력하자. 자꾸 '중간' 타령만 하면 정말로 무색무취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내향형 관종, MBTI 'I' 콤플렉스 극복 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