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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해영시 Nov 14. 2022

도시가 주는 힐링

밤베르크에서의 한나절  

왜 인지 모르지만 로마라니까


독일에 로마가 있었다!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다. 여행 첫날 뉘른베르크로 향하던 중 RB 가 밤베르크에 정차했다. 창밖을 보다 문득 플랫폼 기둥에서 'Fränkisches Rom Bamberg' (프랑켄의 로마  밤베르크)라는 도시 홍보 문구를 봤다. 순간 뇌리에 박힌 건 당연한 일. 프랑켄 지역 일대에서 로마라고 불릴 정도라면 도대체 어떤 도시일까. 예전에 밤베르크에서 공부한 지인이 있어 아름답다고 흘려들은 바는 있으나 사진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라는 말에 온갖 상상력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리고 싶었지만 여행의 본래 목적지이자 숙박이 예약되어 있는 뉘른베르크로 가야 했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날뛰려는 뇌를 진정시키고 다음을 기약했었다. 


그런데 그 밤베르크로 드디어 가게 되었다. 밤 11시에 도착해 다음 날 한나절 돌아보고 저녁에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가야 하는 여유 없는 일정이었지만 몇 시간 만이라도 볼 수 있다는 게 설렜다. 


아침, 날씨가 눈부셨다. 옛도시(Altstadat  구시가지)를 찾아 나섰다. 관광 안내 지도를 보니 밤베르크의 옛도시는 구조가 좀 특이했다. 한 곳에만 몰려 있는 게 아니고 두 개의 강을 사이에 두고 여러 구역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산 도시(Bergstadt), 섬 도시(Inselstadt),  정원사 도시 ( Gärtnerstadt).  


여러 번 지도를 들여다본 끝에 그나마 볼거리가 집약되어 있는 산도시를 주 목적지로 정했다. 버스 안에서 앞자리의 아기 엄마가 해 준 얘기도 참고해서, 먼저 옛시청 (Altes Rathaus)으로 가 '작은 베니스' ('klein Venedig')를 바라보고 최종적으로 카이저 돔(Kaiserdom)으로 가는 코스를 머릿속으로 대략 정리했다. 


울컥 


버스에서 내려 옛시청 방향으로 이어지는 어느 골목으로 들어섰다.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골목 끝에서 다섯 명의 첼리스트들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가브리엘의 오보에' (Gabriel's Oboe)였다. 다른 제목으로는 '넬라 판타지아' (Nella Fantasia). 다들 알겠지만 영화 '미션'에 삽입된 곡인데, 초반부에는 오보에로만 연주되는 기악 버전인 '가브리엘의 오보에'가 나오고, 후반부에는 가사가 붙여진 합창 버전인 '넬라 판타지아'가 나온다. 나는 마치 처음 오보에 소리를 듣고 경계심을 풀고 선교사에게 한발 한발 다가가 연주에 귀 기울이던 정글 속 원주민들처럼, 음악에 끌려 골목 끝 모퉁이로 가 아예 자리를 잡고 섰다.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 (Libertango)도 연주되었다. 다섯 명의 첼리스트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유명한 곡들을 대여섯 개 연이어 연주했다. 그들의 편곡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아직 밤베르크 구경은 제대로 시작도 못했는데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의 선물은 이 음악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자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거의 30 분간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그새 청중들도 6, 70여 명 가까이 불어나 있었다.   


한순간 갑자기 이상한 울컥함이 밀려왔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마음을 어루만진다'라는 것이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경직되어 있던 몸을 마사지로 풀어주듯, 선율 하나하나의 진동이 마음에 파고 들어와 천천히 풀어주고 포근히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가슴속 한가운데에 미세한 진동이 이는 것 같더니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뭐 이런 일이 다 있지? 스스로 놀라는 중에 눈에 눈물이 불쑥 고였다. 아, 별 일이네. 그동안 많이 지쳐있었나, 왜 위로가 되는 것 같지. 눈도, 가슴 속도 따스하게 후련했다.  


동전을 넣는 첼로 케이스에 세금 문제가 복잡해서 CD를 거리에서만 조금씩 팔고 있다는 짧은 안내문이 보였다. 답례로 CD를 하나 샀다. 연주가 끝난 후 한 첼리스트한테 너무 아름다웠고 고맙다고 인사하며 정기적으로 여기서 공연을 하냐고 물었다. 자신들은 각기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데 가끔 시간이 맞거나 날씨가 좋으면 밤베르크에 와서 거리 공연을 한다고 했다. 


거리의 가게들이 음악을 크게 트는 일이 없는 독일에서 가끔 거리를 오가다 우연히 듣게 되는 음악가들의 수준 높은 연주는 오롯이 그 소리에만 몰두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 음악이 거리를 채우고 사람들의 삶에 위로도 되고, 즐거움도 되고, 춤도 추게 하며, 잠깐의 안식을 준다. 음악가들이 거리에서 안전하게 공연하고 예술가로서 대우받는 것, 참 필요하고도 좋은 문화이다. 


날이 좋은 수많은 어느 날들에 이들 첼리스트들을 비롯한 거리의 예술가들 덕분에 또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해하리라.      


다리 한가운데에 지어진 옛시청 


활기차고 넓은 시장터 광장을 지나 옛시청이 보이는 지점에 다다랐다. 앞에 다리가 놓여 있는데, 큰 조각상들도 있고 사람들이 다리 양 쪽 난간에 기대어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리에서 바라보니, 강줄기를 따라 '작은 베니스'가 펼쳐져 있었다. 예쁜 전통 목재 무늬 집들이 다닥다닥 물가에 길게 늘어 선 것이 정말 베니스와 비슷했다. 베니스처럼 물 한가운데 습지에 나무 기둥을 박아 땅을 다지고 지은 건 아니었지만, 워낙 물가에 바짝 붙여 집을 지어 놓았고 집 앞 작은 정원들 밑에는 실제로 물 밑으로 난 기둥들이 보여서, 마치 집이 물 위에 지어진 것 같은 착시 현상을 가져왔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곳은 중세 시대부터 형성된 어부들의 집촌이었다고 한다. 집 앞의 정원으로 보이는 것은 예전에 배를 대 놓기도 하고 그물이나 고기를 말리던 나무 발코니라고 한다. 선착장이자 앞마당이었던 셈이다. 집 앞 발코니에서 바로 배에 올라 타 강으로 출근했던 어부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다리 왼쪽에는 뭔가 수력을 이용하는 듯한 장치가 강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방앗간이 집약적으로 모여 있던 구역 (Mühlenviertel  뮐렌 피어텔)이 있었던 듯했다.  알아보니,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11세기경에 벌써 방앗간이 존재했고 이후 세기를 거듭하며 강가를 중심으로 방앗간 집약촌이 세 개나 형성되었었다고 한다. 물의 힘을 이용해 곡식을 대량으로 빻고 기름을 짤 수 있는 방앗간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 발달과 생산력 증가를 의미하는 매우 특별한 산업체였을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 역사 속에 박제된 추억의 방안간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드디어 시청 차례이다. 다리 정면에 보이는 옛시청 건물은 크고 화려했다. 외벽 전체에 채색된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게 특이했다. 종교적 의미가 있어 보였다. 더 독특한 것은 시청 건물의 위치였다. 정면에서 볼 때는 굴다리가 있어 몰랐는데, 나중에 굴다리를 지나 전체 구도를 보니 시청은 다리 중간에 덩그러니 지어져 있었다. 왜, 다리 위에 시청을 지었을까? 


두 가지 가설이 있었다. 하나는 비숍 영주가 시청을 지을 땅을 주지 않아 섬 도시 구역에 살던 시민들이 강 가운데의 인공 섬에 시청을 지었다는 설. 또 다른 하나는 시민 세력들이 비숍 영주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비숍 영주가 살던 산 도시 구역 바로 코 앞에 일부러 지었다는 설. 어느 것이 맞든 두 가설에서, 당시 시민 세력들이 몇 백 년 지속되어 오던 종교적 권위와 힘겨루기를 할 만큼 성장했고 종교와 분리된 행정 단위로서의 시청을 세우는 주체로서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다리는 하나가 아니라 실은 두 개라고 한다. 두 개의 다리 사이에 인공섬이 있고 그 위에 시청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쪽에는 비숍 영주의 힘이, 다른 쪽에는 시민 세력의 힘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다리 위의 옛 시청은 내게 시민세력의 성장과 함께 종교와 세속의 법과 권리가 점차 분리되어 가던 중세 후기의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를 생생히 전해 주는 하나의 흥미로운 상징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면적의 세계 문화유산 


다리를 통과해서 거리를 구경하다 강 위에 놓인 좁은 길들을 발견했다. 그런 길은 또 걸어야 제 맛이지. 그렇게 걷다가 우연히 '세계 유산 센터' ('Das Zentrum der Welterbe')를 보게 되었다. 아까 옛 시청 굴다리를 지나다 안내문을 보고 밤베르크가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센터가 있다니! 뭔가 자세한 설명이 있을 것 같았다.   


센터 안에는 도시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했는지,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전통 특산물들이 있는지, 시민들이 2차 대전 이후 어떻게 도시를 전통의 모습 그대로 지켜내려 노력했는지 등등 다양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알려 주는 코너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월요일이라 박물관들이 문을 닫아 도시의 겉모습만 보는데 만족해야 할 터였는데, 마치 월척과도 같은 행운이었다.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그냥 낱개의 건축물들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면적의 옛도시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는 것이었다. 2차 대전 때 다른 도시들에 비해 공중 폭격의 피해가 덜 해서, 다행히도 도시형성기인 중세 시대에 지어진 고딕 양식 건축물부터 도시의 변신을 꾀했던 17 세기, 18 세기 바로크 시대에 지어진 건축물들까지 상당수가 파괴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천 년여 동안 쌓인 역사적 유산들이 전쟁이란 재앙 속에서도 살아남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시간이 없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적어도 사흘, 나흘은 머물면서 이 유산들을 천천히 산책하듯 돌아보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제2의 로마   


세계 유산 센터에서 도시의 시작과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대화를 들었다. 천여 년 전,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왕이었던 하인리히 2세 ( Heinrich II)와 그의 부인 쿠니군데 (Kunigunde)가 나눈 대화였다. 물론 옛날 자료들을 바탕으로 연출해서 녹음한 오디오 자료였다. 


그에 의하면, 하인리히 2 세는 밤베르크를 "예루살렘과 로마와 더불어 세 번째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꿈이 있었다. 밤베르크가 세상의 중심지로서 계획된 도시였다니! 당시에 세상의 중심지이란 종교적 중심지를 뜻한다. 밤베르크의 진짜 얼굴을 알게 된 듯한 설렘이 생겼다. 그리고 내심 많이 놀랐다. 신성로마제국 왕의 신앙심이 이 정도라니 너무 뜻밖이었다. 어쩌면 그만큼 중세 시대 세계관 자체가 기독교 절대적이었나 보다 라는 생각도 새삼 들었다.    


나중에 좀 더 알아보니, 하인리히 2세는 밤베르크를 제2의 로마로 만들 계획이었다고 한다. 당시 로마는 교황이 있는 세상의 중심지였다. 로마가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것처럼, 하인리히 2 세는 일곱 개의 언덕이 있는 지형을 갖춘 밤베르크를 선택하여 거기에 새로 큰 돔을 짓고 도시를 형성하도록 했다고 한다. 아, 그래서 프랑켄의 로마라는 말이 생겼구나.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당시의 아포칼립스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기원후 1000 년에 세상의 종말이 오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천'이란 숫자가 주는 신비함 때문일까. 우리도 2000 년을 앞두고 밀레니엄에는 뭔가 막연히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 같은 느낌을 가져 봤기에, 첫 밀레니엄을 겪는 중세 시대 사람들이 그 시간을 얼마나 특별나게 여기고 갖가지 의미를 부여했을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하인리히 2 세는 예수가 재림하여 심판하는 날이 오기 전에 서둘러 돔을 지으려 했다고 한다. 밤베르크에 있는 언덕들에는 다른 교회들과 수도원도 세워져 있는데, 그 교회와 수도원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연결하면 돔을 중심으로 큰 십자가를 이룬다고도 한다. 밤베르크는 철저히 종교적 목적을 위해 설계되고 만들어진 도시, 즉 영적인 영토였던 것이다. 중세에는 영적 영토를 비숍 (Bischof)이 다스렸고 이를 Bistum (비스툼, 교구)라고 했다.  


하인리히 2세는 밤베르크를 따로 떼어 새로운 비스툼, 새로운 종교의 중심지로 건립하기 위해 당시 그 일대를 다스리고 있던 비숍들에게 무릎을 꿇기까지 하며 영토를 양도받았다고 한다. 전 재산을 교회에 기증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1007년 돔이 완성되자 로마에서 교황이 직접 와서 예배를 집도했다. 2 년 후 하인리히 2세와 그의 부인 쿠니군데는 교황으로부터 황제와 황녀로 칭함을 받았다. 이로서 싸움꾼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권력욕이 강했던 하인리히 2 세는 황제가 되려는 정치적 목적도 이룬 셈이다. 


하인리히 2세의 재위 시절 밤베르크는 일시적이나마 제국의 수도로 여겨졌고 종교적으로도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밤베르크 돔. 전설이 된 황제 부부 


그가 지었다는, 카이저 돔 (Kaiserdom)이라고도 불리는 밤베르크 돔 (Bamberger Dom)으로 향했다. 오르막길을 올라 돔에 도착했다. 안에 들어갔더니 하인리히 2세와 쿠니군데의 대리석 무덤이 있었다. 사진을 잘 찍어두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둘러싸고 있어 쉽지 않았다. 


이 무덤은 높은 관 같은 크기였고, 무덤 위 덮개석에는 두 부부가 누워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밑의 네 면에는 황제 부부의 신비한 전설 같은 일화가 담긴 조각들이 새겨 있었다. 쿠니군데가 외도를 했다는 소문이 쫙 퍼지자 날카로운 쟁기날 조각들을 맨발로 밟고 걸어갔는데 피가 한 방울도 나지 않아 그녀의 순결을 증명할 수 있었고 하인리히와 의심했던 귀족들이 모두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일화, 그녀가 돔 건설노동자들에게 후하게 임금을 지급한 의로움을 보였고 한 도둑이 그녀의 돈주머니를 훔쳐 갔지만 불의한 그의 손에는 정작 1 페니히만 남아 있었다는 일화, 하인리히가 죽음을 맞이하여 영혼의 저울질이 시작되었을 때 그가 생전에 했던 아주 작은 선행으로 인해 그의 영혼이 악마가 아닌 천사들에게 인도되었다는 일화 등등. 


하인리히와 쿠니군데는 아이가 없었다. 살아생전 그것은 그들에게 약점이었지만, 그들이 죽고 한참 뒤 그것은 그들이 성자라 불리는 근거가 되었다. 두 부부가 노력하여 쿠니군데가 동정녀 마리아처럼 순결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성자로 추대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왕이나 황제를 통틀어 성자로 추대된 이는 하인리히 2세와 쿠니군데가 유일무이하다. 순결이 미덕으로 여겨져 성자로 추대되다니, 그것도 그냥 자식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천여 년 전의 일이니 그때는 그랬나 보다 이해가 되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어림없는 일이겠지. 아니, 어쩌면 지구 어느 곳에서는 여전히 그런 잣대로 누군가의 신성을 증명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돔에는 교황의 무덤도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밤베르크의 비숍이었다가 로마의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밤베르크 돔에 묻히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고 한다. 교황으로서 독일 땅에 묻힌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여행 당시에 나는 정보도 없고 시간도 없어 그의 무덤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돔을 나와 시내를 내려다보니 먼 곳의 언덕도 보이는 것이 도시가 참 아늑하고 아름다웠다. 돔 옆에 있는 옛날 황제의 궁 앞뜰을 지나 비숍 영주들이 살았던 궁의 장미 정원에 들어가자 장미 향이 가득했다. 거기서도 내려다보니 시내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까지 펼쳐진 도시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원해지고 평안해졌다.  


밤베르크는 여러 모로 힐링이 되는 도시였다. 언젠가 다시 한번 가서 며칠간 여유있게 구석구석 탐구하고 누려보고 싶다. 박물관들 안에도 들어가 보고, 그 유명한 훈제 맥주도 맛보고, 정원사 도시 구역에서 도심 속 농사짓는 모습도 보고.  


내려오는 길에 가게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는데 더없이 시원하고 행복했다. 



옛시청.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2022 박 해영시 



옛시청. 양쪽에 다리가 하나씩 보인다. ⓒ 2022 박 해영시 



옛시청 굴다리를 지나면 산도시가 시작된다. 거리의 모습. ⓒ 2022 박 해영시 


밤베르크 돔 ⓒ 2022 박 해영시 



알트 호프퉁 (Althoftung)으로 들어가는 토어. ⓒ 2022 박 해영시 


돔 안에 있는 하인리히 2세와 쿠니군데의 대리석 무덤. ⓒ2022. 박 해영시 


노이에 레지덴츠 (Neue Residenz), 비숍 영주들이 살던 궁을 나오며 문에서 바라 본 돔의 모습 ⓒ 2022 박 해영시 


돔에서 바라본 밤베르크 시내 ⓒ2022 박 해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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