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과의 재회
"[RE] Apology Accepted – Future Cooperation Appreciated"
([회신] 사과 수용 – 향후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메일 제목을 보는 순간, 도현은 안도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마티유 드랑, 프랑스 바이어가 드디어 답장을 보내온 것이다. 손끝이 떨리는 것을 애써 누르며, 도현은 메일을 열었다.
「Dear Mr. Kim,
Thank you for your swift and sincere response regarding the recent packaging issue. We appreciate your proactive handling and willingness to take immediate corrective action. We look forward to continuing and strengthening our business relationship.
Best regards, Mathieu Drang」
(김 대표님께,
최근 포장 문제에 대해 신속하고 성실하게 대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적극적인 조치와 즉각적인 시정 의지를 높이 평가합니다. 앞으로도 저희는 귀사와의 비즈니스 관계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가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마티유 드랑 드림)
도현은 메일을 읽고,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숨을 토해내듯 길게 내쉬었다.
"대표님, 드디어 답변이 온 건가요?"
효진이 긴장한 얼굴로 다가왔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응, 잘 해결됐어. 마티유 드랑이 계속 거래하고 싶다고도 했어."
사무실 안에는 묘한 안도감이 퍼져나갔다. 유리도 모니터 너머로 조심스레 미소를 지었다. 팀 모두가 며칠 동안 이어진 긴장의 실타래를 잠시 풀 수 있었다.
프랑스 파리 출장 이후로 계속해서 이어진 자료 검토와 마티유 드랑의 컴플레인 처리까지. 도현의 하루는 빠듯했고, 지난 몇주 간 숨 쉴 틈이 없었다. 오늘따라 오전부터 머리가 묵직하더니, 어느새 어깨까지 굳어진 느낌이었다. 책상 한쪽엔 식다 못해 미지근해진 커피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빛이 부드럽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정적처럼 고요한 사무실 안, 갑자기 도현에게선 익숙한 피로의 냄새가 아닌, 오래 전 기억의 향이 떠올랐다.
“나가서 커피나 마셔야겠다.”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걸치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늦은 오후, 봄 햇살이 뉘엿뉘엿 건물 벽면을 스치고 있었다. 뷰티스타 코스메틱 사무실 근처에는 도현이 평소 자주 방문하던 로스터리 카페가 있었다. 외진 골목 끝자락, 간판 하나 없는 그곳은 ‘서울 속의 숨은 안식처’ 같았고, 그 고요함이 가끔은 도현의 머릿속을 정리해주는 명상 같은 공간이 되곤 했다. 그곳은 예전에 여자친구였던 미정과도 자주 왔던 곳이었다.
카페 문을 열기 직전, 유리창 너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짙은 갈색의 트렌치코트, 단정한 실루엣,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로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돌린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바로 미정이었다. 서로를 본 순간, 둘 다 잠시 멈췄다. 놀람과 당황, 그리고 낯선 반가움이 얽힌 표정들이 엇갈렸다. 그녀가 먼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다가왔다.
“혹시, 김도현?”
“아... 미정이구나. 오랜만이다. 그 동안 잘 지냈어?”
어색한 미소가 둘 사이에 오갔다. 도현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데 몇 초가 더 걸렸다. 그녀는 여전히 도현이 기억하던 예전 그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조금은 더 정돈된 외모, 조금은 더 여유로워 보이는 눈빛이 그 안에 녹아 있었다.
“아직도 여기에 자주 와?”
미정이 먼저 말을 걸었다.
“회사 근처여서, 회의 끝나거나 좀 쉬고 싶을때 가끔 들려.”
“뷰티스타 코스메틱, 맞지?”
그녀는 컵을 들어 입을 축였다.
“친구한테 들었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하는 유명한 뷰티전문 전시회에 나갔다고.”
“응. 이제 시작이야. 이제 겨우 처음으로 수출 조금 성공했어. 첫 수출하는데 창업하고 2년 넘게 걸렸네.”
도현은 머쓱한 듯 웃었고, 미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도현은 읽을 수 없었다. 감탄인지, 회한인지,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인지.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눈빛에는 계산된 무언가가 숨어 있는 듯 보였다.
“그때 너와 헤어지고, 난 너 그만 둘 줄 알았어. 네가 그렇게 열심히 할 줄은 몰랐어. 솔직히 말하면... 좀 놀랐어. 그때 너 많이 힘들어 했잖아.”
그 말에 도현의 손가락이 살짝 굳었다. 머릿속에 오래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미정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
“미안해. 더는 같이 못하겠어. 너 지금 아무것도 없어. 너무 불안해.”
그 한 문장이, 그날 밤 도현을 무너뜨렸었다. 잡고 싶었지만, 잡을 수조차 없었다.
“힘들긴 했지. 근데, 덕분에 많은 게 달라졌어.”
그 말에 미정은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네가 여기까지 온 건 대단한 일이야. 진심으로. 나... 좀 감탄했어. 내가 아는 김도현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였으니깐.”
도현은 미정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엔 조심스러운 경계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넌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도현이 되물었다.
“근처에 일하러 왔다가 이제 돌아가는 길이야. 잠깐 시간 나서 들렀는데, 설마 너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지.”
“우연히라도, 좀 놀랍네.”
“근데 도현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우리 그때 너무 감정적이었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보면, 너도 많이 지쳐 있었고, 나도 불안했었고. 그땐 나도 잘 몰랐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어."
“...”
“지금은 서로 좀 다르잖아. 어쩌면... 다시 얘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 말에 도현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커피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도현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미정아.”
“응?”
“그때 넌 떠났고, 난 그걸로 무너졌어. 그땐 내가 가진 게 없어서 널 잡을 수조차 없었어. 근데 그게 끝이 아니더라. 내가 뭘 믿어야 하는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뭘 지켜야 하는 지를 그때서야 처음 알게 됐어.”
미정은 말없이 도현을 바라봤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내가 힘들 때 내 옆에 있어줬어. 말없이, 조건 없이.”
미정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알겠어. 그냥, 그냥 궁금했어. 네가 아직 어떤 생각인지.”
도현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정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계산을 마친 후 커피를 한손에 들고 문을 나섰다. 바람이 불었다. 오늘 따라 유난히 더 선명했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해는 완전히 져 있었다. 조명이 하나둘 켜지고, 남은 직원들은 각자의 일을 정리하며 퇴근 준비 중에 있었다. 도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유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대표님, CRM 주간 리포트 정리 끝났어요. 공유 드릴게요!"
도현은 짧게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고 모니터를 켰다. 그때, 문이 열리며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 바쁜 김 대표님, 시간 좀 되려나?”
백상무였다. 회의실 한쪽으로 자리를 옮긴 백상무는 무표정한 얼굴로 작은 메모장을 꺼냈다.
“프랑스 수출 건, 들었어.”
도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랑 불량으로 전량 리콜했다고? 클레임도 꽤 강하게 들어왔다고 하던데.”
“예. 확인했고 현재 원인 분석과 내부 프로세스 개선 조치 완료했습니다.”
백상무는 메모장을 덮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가 바이어를 처음 만났을 때,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지. 근데 지금 상황은 어떄? 신뢰가 생기긴 커녕, 흔들리고 있는 거 아냐?”
도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사안을 바탕으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어떤 준비를 해야하는지 깨달았어요. 이번 클레임을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로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크레임 방지를 위한 매뉴얼을 더 보완했어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조건을 다시 상기시켜줄께. 6개월 연장하는 투자 조건 기억하지?”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6개월 이내, 수출 계약 1건. 그리고 5천만 원 이상.”
“김 대표 생각에는 그게 가능할 것 같아?”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일부러 감정을 건드리는 비꼬는 말투였다.
“반드시...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만들겠다는 말, 너무 많이 들었어. 이젠 보여줘야 할 때지. 우리가 투자자로서 선택지를 고민하는 시점이 오기 전에 말이야.”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변명도, 핑계도 필요 없었다.
그날 밤, 도현은 혼자 사무실에 남아 유리가 보내준 CRM 주간 리포트와 효진이 정리한 클레임 대응 체크리스트, 그리고 파리 물류 클레임 관련 메일을 번갈아 읽고 있었다. 겨우 해결되긴 했지만, 전량 리콜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고, 백상무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그 위에 또 하나의 무게를 얹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릴 수도 있었던 감정은 되려 단단해졌다.
그는 잠시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시계를 봤다.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사무실은 조용했고, 책상 위 커피는 다시 식어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조용히 진동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퇴근하셨어요?”
지우였다.
“아직 퇴근 안했어요. 지우씨는 퇴근 하셨어요?”
곧바로 답장이 왔다.
“오늘 영상 촬영 피드백 정리하다가, 그냥 대표님이 생각나서 연락드렸어요. 퇴근 안하시고 늦게까지 뭐하세요?”
도현은 키보드를 멈춘 채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묘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까 낮에 미정을 봤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그 온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안정감이었다.
“아니에요. 그냥 오늘, 좀 생각할 일이 있어서 잠시 사무실에 남아있어요.”
지우의 답장은 없었다. 그러나 도현은 기다리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답이 없어 불안했을 텐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침묵조차 이상하게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흐릿한 가로등 불빛이 퍼지고 있었고,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도현은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은 누구지?’
그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미정은 떠났다. 힘들 때 등을 돌린 사람이었고, 그건 그 어떤 말로도 쉽게 잊히지 않는 감정의 상처였다. 반면, 지우는 힘들 때마다 응원해주었고, 옆에 있어주었다. 아무 말 없이, 언제나처럼. 도현은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며 조용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괜찮아. 나 지금 충분히 괜찮아.”
그리고, 다시 일을 이어갔다. 사무실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침묵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그때 또 다시 핸드폰이 진동했다.
"힘드시겠지만, 화이팅하세요. 그리고 주말에 뵈어요!"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