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석의 과거(하)
효진은 천천히 카페를 나섰다. 봄볕이 내리쬐는 거리, 길거리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효진은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커피잔에 남아 있던 미지근한 온기, 그 아래 조용히 깔린 그림자, 그리고 기호가 남긴 말들이 계속해서 효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 내가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과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특히 그 문장이 효진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기석은 자신의 오만 때문에 큰 실패를 겪었다. 그리고 그 실패는 자신이 몸 담았던 회사의 존폐까지 영향을 미쳤다. 결국 그는 다시 일어섰지만,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더 조심스러워졌고, 신중해졌다. 그리고 그가 쌓아온 원칙과 디테일은 ‘완벽주의 성향’이 아니라 ‘예전 상처로 인한 흉터’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겨우 이해하게 된 것이다.
사무실로 돌아온 효진은 자리에 앉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기석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모니터는 꺼져 있었고, 회색 철제 캐비닛 위엔 언제나처럼 있던 문서 트레이도 사라져 있었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공백은 사무실 안 곳곳에 남아 있었다. 효진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며칠 전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도현이 기석의 제안을 일축했던 장면.
“그 방식 옛날 방식이에요. 지금은 유연해야만 살아남는 시대입니다!”
그땐 도현의 말이 옳은 것만 같았다. 효율만 따지면, 확실히 기석의 의견은 ‘답답한 노인의 꼰대식 매뉴얼’처럼 느껴졌다. 효진 자신도 그렇게 느꼈다. 불확실한 시대엔 도전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짜증이 났다.
‘대표가 하라면 하는 거지, 왜 저렇게까지 깐깐하게 구는 거야.’
‘매번 검토, 재검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했던 이야기 또 하고...’
하지만 이제는 그때 그가 했던 말, 그 상황이 다르게 보였다. 그 사람은 단지 ‘검토’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번 무너졌던 사람’이었고, ‘다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더디지만, 확실하게 걸음을 걷는 사람’이었다. 비즈니스에서 ‘지키지 못한 약속’이 얼마나 뼈를 깎는 상처로 남는 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석은 다시는 ‘함부로 약속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효진은 그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입꼬리를 내렸다. 이제 와서야 떠오르는 기석의 말들이 너무 많았다.
“‘실패’는 눈앞의 사소한 무시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복구’ 역시 그걸 기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회의에서 그가 조용히 건넨 말 한마디, 가끔 노트에 적어놓던 계획들, 디자인 샘플을 보며 했던 미묘한 지적들, 샘플 리스트에 '소비자 클레임 가능성'이라고 적어 놓은 붉은 메모들. 그때는 왜 그런 것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별거 아닌 거라고 느꼈을까. ‘왜 이렇게 꼰대 같지?’라고만 생각했던 그 조언들이, 사실은 누군가를 구하려던 작은 손짓이었다는 걸 왜 몰랐을까.
“효진 씨...”
유리의 목소리에 효진은 고개를 들었다.
“대표님께서 찾으세요. 회의실에서 4시에 뵙자고 하시네요.”
몇 시간째 도현은 회의실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미나 하라다 측으로부터 온 수십 개의 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노트북의 트랙패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만,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된 채였다. 서류 더미 옆에 쌓여 있는 건 미나 하라다 측이 요구한 품목별 설명서, 본사 생산 파트와 주고받은 수정 스케줄표, 그리고 빨간 줄이 여러 개 그어져 있는 노트였다. 빨간 글씨로 적힌 ‘딜레이 예상’, ‘공정 리드타임 재조정’이라는 문구가 도현의 눈을 찔렀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다 맞춰...”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현은 미나 하라다의 오더를 받은 이후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시간이 부족한 것도 원인이었지만,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패키징 디자인 수정만 다섯 번, 생산 단가 조정은 세 번. 원재료 수급 문제로 인한 조달 일정은 이미 1주일 뒤로 밀려 있었다. 그는 매일 밤 OEM 업체의 생산 담당 팀장과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샘플이 도착하면 누구보다 먼저 열어보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느껴지는 건 ‘무언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바로 기석이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 기석이 있었다면, 지금쯤 저 계약서의 조항 중 몇 가지는 사전에 막아냈을 것이다. 도현에게 기석은 그저 ‘조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래를 예견하는 사람’이었다. 오더가 어떻게 들어올지, 바이어는 어디서 꼬투리를 잡을지, 우리가 어디서 삐끗 할지를 미리 내다봤다.
도현은 기석의 부재와 필요성을 처음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기석이 떠난 것이 ‘불편’함 때문이라고 느껴졌다면, 지금은 달랐다. ‘그가 없다는 건, 우리가 방향 감각을 잃은 배와 같다'는 뜻이었다. 도현의 머릿속에 며칠 전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 조건, 납기상 안 됩니다.”
“되게 만들어야지요.”
“되는 게 아니라, 되게 해야 하니까 더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땐 기석의 말이 단순한 고집으로만 들렸다. 그리고 시대에 뒤떨어진 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 말의 무게가 어떤 건지, 그리고 도현은 노트북을 닫으며 조용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 선생님... 거기 계셨다면, 지금 뭘 먼저 하라고 하셨을까요...”
도현은 회의실 너머로 보이는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기석이 늘 앉던 자리가 보였다. 그리고 도현은 문득 생각했다.
‘나는 이 회사를 위해 뭘 하고 있는 걸까... 단지 계약만 따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혹시 내가, 내 욕심이 회사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무지를 곱씹으며, 도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효진이 회의실 문을 열자, 도현은 고개를 숙인 채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 위엔 많은 종이 서류가 흩어져 있었고, 한켠엔 미나 하라다 측에서 온 리마인드 메일이 여러 장 출력되어 있었다.
“효진 씨, 앉으세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건조했다. 효진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있은 뒤, 도현은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두 손을 치우고, 메일을 가리켰다.
“오늘 오전에 도착한 거예요. ‘Final Pre-Contract Review Request’라는 제목인데, 계약 체결 전 마지막으로 검토해 달라는 내용들이 적혀 있어요. 근데 생각보다 너무 디테일하네요.”
효진은 메일을 들여다보았다. 영어로 빼곡히 적힌 조항들 사이에는 ‘납기 오차 허용 범위’, ‘성분 안정성 3단계 테스트 결과’, ‘원산지 세부 증명자료’와 같은 문장이 눈에 띄었다. 효진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건 단순한 확인용이 아니었다. 미나 하라다 측은 ‘이 계약이 정말 실현 가능한지’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대표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효진은 말을 삼켰다가,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지금 저희 생산 여건으론 100% 위험해요. 특히 이번 신제품... 패키징 쪽, 아직 테스트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요. 성분 안정성 3단계도 지난번엔 두 번째 단계에서 멈췄잖아요.”
도현은 조용히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이마를 짚었다.
“나도 알아요.”
도현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마치 숨을 삼키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더 조급했는지도 몰라요. 자꾸 밀리면... 미나 하라다 쪽 신뢰를 잃게 될까봐.”
효진은 말없이 도현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희... 한 선생님, 만나봐야 할 것 같아요. 같이 만나러 가요. 그리고 다시 모셔와요.”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엔 예상치 못한 당혹스러움과, 그보다 더 깊은 부끄러움이 숨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도현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제가 한 선생님께 너무 쉽게 상처를 줬어요.”
도현의 목소리는 낮았고, 무거웠다.
“정말... 너무 쉽게.”
효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표님, 한 선생님이 왜 그렇게 까다롭고, 완벽주의자처럼 보였는지, 저도 사실 얼마 전까지는 몰랐어요.”
도현은 눈을 들어 효진을 바라보았다. 효진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 보았다.
“오늘, 오전에 프랑스 파리 전시회 사후 정산 자료를 제출하러 갔다가 정기호라는 분을 만났어요. 한 선생님과 예전에 함께 일했던 분이라고 하시더라구요.”
효진의 말에 도현은 놀란 듯 보였다. 그리고 효진의 말투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한 선생님, 유럽지사 총괄이던 시절에... 엄청난 실패를 겪으셨더라구요.”
도현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프랑스의 마리옹 르벨이라는 바이어가 있었어요. 유럽 전역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녀와의 대량 공급 계약을 무리해서 수락하셨데요. 계약 조건도 과했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납기를 맞히려다 품질관리가 무너졌고, 결국 제품이 전체 다 리턴되고 말았어요.”
“리턴?”
도현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계약했던 물량 중 상당수가 리턴되었고, 유럽 지사는 6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고 해요. 회사 손실은 수백만 유로였고요. 그런데 한 선생님은 그 책임을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않았데요. 마지막까지 손실을 정리하고, 일부는 본인 사비로 채웠다고 하더라고요.”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효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절대 아무 말이나 쉽게 하지 않는 분이 된 거예요. 한 문장을 쓰더라도, 하나의 조항을 검토하더라도, 그게 나중에 얼마나 큰 파장이 될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니까요. 함부로 말하지 않고, 함부로 약속하지 않는 사람이 된 거죠.”
도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떨궜다.
“그런 사람한테 내가 했던 말들... 참...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효진은 조용히 말했다.
“아마 한 선생님은 대표님이 고의로 그랬다고 생각하진 않으실 거예요. 그분은, 본인이 틀렸던 적이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니까요.”
"이해해... 주실까요?
효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비단 도현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회사 전체가, 팀 전체가...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서야 그 공백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엔 묘한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먼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엔 같은 마음이 있었다.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 그 사람에게.’
도현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요?”
효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같이 가요. 혼자 가면 안돼요.”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