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rade: 무역왕 김스타 30화

한기석의 과거(중)

by 이설아빠

카페 안은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스며들며, 공간을 조용히 감싸고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은 효진은 양손으로 커피잔을 감싸고, 눈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기호. 오래전 기석과 함께 일했다는, 그리고 누구보다 그의 과거를 잘 안다고 말하는 사람. 그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듯, 한참이나 침묵했다. 마치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무엇부터 조심스럽게 꺼내야 할지, 오래된 서랍을 여는 사람처럼 침묵을 이어갔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처음엔 우리 둘 다 젊었죠. 기석 형님을 처음 만난 게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이었어요.”

기호는 그렇게 입을 뗐다. 그의 시선은 효진이 아닌, 테이블 위에서 반사되는 햇살을 향해 있었다.

“그때 기석 형님은 잘 나가던 무역 상사의 유럽 총괄이었어요. 파리, 뒤셀도르프, 마드리드... 유럽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시장을 가진 도시들을, 한 달에도 수차례 돌며 바이어를 만나야 했죠. 저는 파리 지사 소속으로, 기석 형님 밑에서 일했죠.”

효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도시 이름들이 점점 생생한 장면으로 떠올랐다.

“기석 형님은 그때 대단했어요. 정말로... 멋졌어요. 후배들은 모두 기석 형님을 동경했죠."

기호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당시 유럽 바이어들 대부분은 처음엔 우릴 의심했었죠. 동양인, 한국에서 온 비즈니스맨들, 특히 무역맨들에게 의심이 많았거든요. 그땐 다 그랬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사람, 기석 형님은 항상 데이터를 들고 다녔어요. 그래서 바이어들 앞에선 절대 말로 지는 법이 없었죠. 아니, 말보다 숫자였어요. 언제나 수치를 앞세웠고, 설득력이 있었죠. 품질 클레임 비율, 납기 정확도, 원가 절감률 등 바이어가 질문하기 전에 이미 대답이 나왔어요. 우리 내부에선 ‘기석이 한 번 회의에 들어가면 계약이 따라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죠.”

기호의 말에는 열기가 섞여 있었다. 과거의 감정이 아니라, 그 순간으로 돌아간 사람의 생생한 체온처럼.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어요. 그때 프랑스의 마리옹 르벨 여사라고 있었는데, 유럽 코스메틱 업계에서 까다롭기로 악명 높았던 바이어였죠. 그녀의 유통망을 거치지 않고서는 프랑스에 제품을 팔기 어렵다는 말이 있었죠. 그래서 정식 비즈니스 미팅 잡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대다수는 포기했죠. 그런데 형님은 아니었어요.”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몇 주 동안을 한 번도 쉬지 않고, 그녀의 사무실을 찾아갔어요. 그러다 하늘이 도왔는지 미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죠. 사실 그날 미팅도 경쟁 업체가 마지막에 포기하면서 생긴 빈 시간에 간신히 끼어든 거였어요. 미팅 시작 10분 전까지도 마리옹 여사는 우리를 외면했어요. 난 속으로 ‘오늘도 꽝이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요?”

“형님은 그 자리에서, 단 한 장짜리 비교 분석표를 꺼내 마리옹의 비서에게 건넸어요. ‘귀사와 유사한 포지션의 브랜드들이 현재 한국 시장에서 어떤 점유율을 가지고 있고, 어떤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지, 이 한 장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마리옹 여사는 그걸 보고 멈칫했어요. 그리고 예정에도 없던 미팅을 시작할 수 있었죠.”

효진은 숨소리까지 죽이며 기호의 말에 집중했다.

“15분짜리 미팅이었는데, 1시간 20분을 넘겼어요. 형님은 프랑스어로 제품 성분부터 물류 체계, 패키징 친환경성까지 술술 설명했고, 마리옹 여사는 그날 처음으로 웃었죠. 결국 그렇게 첫 번째 계약이 체결되었고, 유럽 매출이 3배로 뛰었어요. 그때 업계 잡지에 ‘동양의 전략가’라고 기석 형님이 실릴 정도였어요.”

효진은 속삭였다.

“정말, 전설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이었네요.”

기호는 잠시 웃었다가, 이내 표정을 거뒀다. 눈빛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 한 마디가 공기 속으로 가라앉았다.

“모든 게 잘 풀리던 어느 날이었어요. 마리옹 여사와 추가 계약을 준비하던 중이었죠. 새로운 제품군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본격적인 유통을 확대한다는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마리옹 여사는 우리에게 주문 수량을 평소보다 4배 이상으로 요청했어요. 이유는 간단했어요. ‘지금이 기회다. 경쟁사들이 물량 확보를 못 하고 있다’는 거였죠.”

효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말 그대로 ‘일감 몰아주기’ 같은 거네요?”

기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의 공기는 어느새 무거워져 있었다. 향긋했던 커피 향도, 부드러운 재즈 음악도 배경이 아닌 벽이 되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말들을 더욱 선명하게 떠올리게 했다. 기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마리옹 여사의 제안은, 그 당시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였죠. 우리 제품이 유럽 유통망에 대량으로 들어가는 최초의 사례가 될 수도 있었고, 업계 내에서 영향력이 커지는 결정적 순간이 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동시에, 리스크도 컸어요.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었던 사람도 기석 형님이었어요."

효진은 현재 뷰티스타의 상황과 많이 유사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사의 재무팀은 계약 승인을 보류했고, 본부장도 ‘이건 물량이 아니라, 시간과의 싸움이다’며 고개를 저었어요. 심지어 품질팀에서는 전면 보류 의견까지 냈죠. 공급망 담당자는 ‘지금 생산 능력으로는 두 달 내 납기가 절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고, 업체의 대표와 품질 팀장은 ‘과도한 생산 압박은 검수 생략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노골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었죠.”

효진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까지 하셨어요?”

기호는 허공을 잠시 응시했다.

“글쎄요. 그건... 아무도 몰라요. 형님 본인도, 그땐 몰랐을 거예요. 다만, 제 눈엔 아마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증명이요?”

효진의 물음에 기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제품의 경쟁력,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자신감, 그리고 자신이 유럽 시장에서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는 것. 기석 형님은 그걸 넘어서고 싶었던 거예요. 누군가는 늘 그를 ‘전략가’라고 칭했지만, 정작 형님은 그걸 ‘모험가’로 착각했던 것 같아요.”

기호의 말투가 느려졌다.

“결국, 납기일이 미뤄지고, 생산 현장은 아비규환이었죠. 밤새도록 돌아가는 기계, 납기 맞춘다고 아슬아슬하게 재조정하는 컨테이너 스케줄. 그 사이에선 당연히 품질관리가 무너졌고, 그중 일부 제품에선 미세한 표기 오류, 뚜껑 오차, 미포장 샘플까지 섞였어요. 그것들이 어디로 갔을까요?”

“품질 검수 없이, 그대로 유럽으로 갔어요?”

“그대로 마리옹 여사의 손에 갔죠.”

기호는 말끝을 다물었다.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잠시, 그의 손이 커피잔을 다시 감쌌다.

“마리옹 여사는 미팅 자리에서, 포장을 손수 뜯어보였어요. 박스를 여는 순간부터 미묘한 표정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죠. ‘이건 이전과 다르다’는 듯한 시선과 실망이 공존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단 한 마디만 했어요. '이건 브랜드가 아니라, 급히 쓸어 담은 창고의 쓰레기처럼 보여요. 이 제품엔 철학이 없군요.'"

효진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기호는 말을 이었다.

“그날 이후 마리옹 여사는 계약을 전면 중단하고, 우리가 납품한 제품을 전량 리턴 조치했어요. 그녀에게 중요한 건 물건이 아니라 ‘신뢰’였던 거였죠. ‘품질도 물론 중요하지만, 마리옹 여사는 너희가 그걸 감당할 수 있느냐’를 본 거죠. 근데 형님은 감당하지 못했어요. 아니, 하겠다고 말해놓고... 해내지 못한 거죠.”

“그게...”

효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럽 지사 철수의 직접적인 원인인가요?”

기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직접적인 계기는 마리옹 여사의 계약 파기였지만, 그보다 큰 건 ‘평판’이었어요. 유럽 시장은 연결되어 있어요. 어느 한 거래처에서 문제가 생기면, 다른 바이어들도 바로 알게 되죠. 특히, 마리옹 여사처럼 영향력 있는 인물과의 신뢰가 무너지면, 그건 업계 전체에 부정적인 신호가 되는 거예요. 그 뒤로 예정되었던 3건의 대형 바이어 미팅이 전부 취소되었어요. 그리고… 6개월도 안 돼서 유럽 지사는 철수 명령을 받았죠.”

효진은 숨이 막혔다. 말 한마디가, 판단 하나가, 그렇게 사람과 회사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기석 형님은, 혼자서 그 무게를 다 감당했어요. 직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고, 바이어에게도 변명하지 않았어요. 회사에는 사표를 내기 전까지 끝까지 손실 보고서를 제출했고, 심지어 일부는 본인의 사비로 손해를 메우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결국 다른 나라의 거래처를 뚫어서 손실도 거의 메꾸었죠.”

“그렇게까지...?”

기호는 조용히 웃었다.

“그게 기석 형님이었어요. 무너져도, 마지막 자존심 하나만큼은 지키려 했던 사람. 아마 형님은... 그 사건 이후로 많이 변했죠.”

기호의 말에 효진은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어떻게요?”

“어떤 제안도, 어떤 기회도 함부로 말하지 않아요. 늘 확인하고, 검토하고, 가능성과 한계를 분리해서 판단하려고 하죠. 그리고 문장 하나를 쓸 때도, 계약서를 검토할 때도... 마치 다시 무너질 수 있다는 마음으로 보는 것 같아요. 신뢰를 잃고, 무너져본 사람이기 때문에...”

효진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창밖 거리엔 여전히 따뜻한 햇살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가슴 한편은 차갑고 묵직하게, 바다 밑바닥으로 침몰한 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문득, 며칠 전 도현이 회의실에서 기석의 의견을 자르듯 말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는 도현이 옳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효진은 기석이 왜 도현에게 그렇게 조심스러웠는지를, 그리고 단호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건 감정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에게 던지는 경고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모든 걸 잃고도 약속을 지키려 했던 사람, 그 무게를 짐작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 사람은 단지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껴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 사람이구나.’

그때 기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되었네요. 오랜만에 옛 추억을 꺼내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제가 선약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아, 그리고 기석 형님은 지금도,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질문을 하실 거예요.”

“어떤 질문이요?”

기호는 입구를 향해 걸어가다 멈추며,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때, 내가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과 행동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형광등 불빛 아래, 커피잔의 그림자만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남겨진 효진은, 입술을 깨물었고 텅 빈 커피잔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누군가의 과거가, 지금의 우리가 되고 있다는 걸, 그제서야 뼈저리게 느낀 채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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