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rade: 무역왕 김스타 29화

한기석의 과거(상)

by 이설아빠

기석이 떠난 이후, 뷰티스타 코스메틱 사무실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 키보드 치는 소리, 전화벨 울림. 모든 건 여전한데, 무언가가 뚝 끊긴 듯했다. 공기의 밀도랄까, 리듬감이랄까.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분명 모두가 자리에 앉아 일하고 있는데도, 어딘가 ‘어긋난’ 느낌이 공간 전체에 잔잔히 깔려 있었다.

가장 크게 체감된 건 바로 기석의 자리였다. 누군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공석’이라는 두 글자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늘 같은 시간 켜져 있던 모니터는 오늘도 꺼져 있었고, 그의 종이 넘기는 소리도, 키보드를 두드리던 리듬도 사라졌다. 도현은 그런 '소리의 부재'가 이렇게까지 크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도현은 누구보다 일찍 출근했지만, 늦게 서야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커피를 내렸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가 다시 껐다, 그리고 켰다를 반복했다. 메일함엔 그동안 쌓인 업무 메일로 빼곡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늘 기석이 먼저 정리한 순서대로 브리핑을 올려주었고, 도현은 그중에서 중요한 것만 골라 결정하면 되었다. 도현은 그제서야 실감하고 있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혼자' 결정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내가 앞에서 지휘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 사람 덕분에 중심을 잃지 않았던 거였어.’

마우스 커서를 따라 시선이 움직이다 말고, 도현은 고개를 떨궜다. 단 한 마디로, 그 사람을 밀어냈다는 죄책감이 하루 종일 어깨 위를 짓눌렀다.

'일단 보고는 넘겼고, 포장 업체 견적은 아직이고, OEM 확인은...'

머릿속에서 리스트를 정리하다 말고, 도현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한 선생님이었으면 이런 건 벌써 표로 정리해서 공유해 주셨을 텐데...’

책상 서랍을 열자, 구겨진 회의 메모 한 장이 보였다.

‘3월 30일까지 유통사 납기 최종 확인 필요. 바이어 질의 대응 문안: 2차 검수 완료 후 전송. 물류비 증액 시, 프랑스 측 비용 분담 가능성 있음 → 김 대표 협상 필요’

그 필체는 단정했고, 마치 수학 공식처럼 명확했다. 한 줄 한 줄이 도현에게 ‘너 지금 뭐 하고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회의실 쪽을 바라보았다. 화이트보드 한켠엔 아직도 기석의 필체로 적힌 ‘이번 달 마감 목록’이 지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펜 색깔도, 글씨도 다르지만, 이상하게도 누구 하나 나서서 그것을 지우지 않았다. 지워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지우는 순간 진짜 떠난 걸 인정하게 될까 봐... 모두가 그것을 슬며시 피하고 있었다.


반대편 자리에서 효진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기석의 정리함을 열고 있었다. 회사 규정상 떠난 직원의 업무 문서를 정리하는 건 효진 담당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효진이 직접 하고 싶었다.

“효진 씨, 괜찮겠어요? 그거 제 담당인데...”

유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효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요. 확인만 하고, 필요하면 대표님께 넘기려고요.”

기석의 책상은 놀라울 만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서랍에는 고객사 리스트와 거래 히스토리가 파일 단위로 구분되어 있었고, 가장 아래 칸엔 오래된 수출입 매뉴얼과, 손으로 직접 쓴 바이어 대응 지침 노트가 있었다. 그리고 효진은 그 노트를 펼쳤다. 첫 장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바이어는 계약보다 신뢰를 기억한다. 서류는 장부에 남지만, 말은 기억 속에 남는다.’

효진은 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떠난 빈자리를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효진은 노트를 덮지 못한 채, 그대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첫 장에 적힌 그 문장, 그 말이 어딘가 낯익었다. 그리고 예전에 기석과의 여러 일화가 스쳐 지나갔다.

뷰티스타 코스메틱에서 처음 무역 일을 시작했을 때였다. 효진은 자료 하나를 잘못 번역하여 바이어에게 보냈다. 도현이 알면 혼날까봐, 덜덜 떨던 그녀에게 기석은 아무 말 없이 문서만 조용히 다시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는 딱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음부터 해외 바이어에게 메일을 보낼 때는 저에게도 한번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최대한 도움드리겠습니다.”

책망도, 화도 없었다. 그땐 그 다정함이, 이상하리만큼 낯설게 느껴졌었다. 또 한 번은 기석은 혼자 남아 문서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효진이 "바이어는 숫자가 전부 아닌가요?"라고 물었을 때, 기석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신뢰는 숫자보다 오래갑니다. 서명은 계약서에만 남지만, 신뢰는 마음속, 그리고 기억 속에 남게 됩니다.”

그땐 대충 ‘아, 또 고리타분하게 말씀하시네’ 하고 넘겼었다. 지금은 그 말이 심장을 꿰뚫듯 명확하게 와닿았다. 그는 틀린 게 아니었다. 그저, 우리보다 너무 빠르게 옳았을 뿐이다.


며칠 후, 효진은 프랑스 파리 전시회에 참석했던 정산 자료를 들고, 정부지원기관 해외마케팅팀을 찾았다. ‘해외전시회 참가기업 지원사업 – 사후 정산’이라는 제목이 인쇄된 서류철을 품에 안은 채, 효진은 한층 무거워진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온라인으로 서류를 제출할 수도 있었지만, 오늘이 서류 제출 마감이기도 했고, 혹시 서류가 잘못된 게 있는지 담당자에게 바로 확인하고 싶어 직접 제출하기로 하였다.

‘한 선생님이 계셨으면, 오늘 아침까지 서류 확인 두 번은 더 했을 텐데…’

효진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해외 마케팅 담당자를 찾았다. 그녀의 손엔 하이라이터로 표시된 서류 목록이 잡혀 있었다. 부스 설치 계약서, 통역사 고용 내역, 항공료 계산서, 홍보물 제작 견적서, 바이어 미팅 일지, 영문 카탈로그 사본 등 각 항목마다 파일 인덱스가 붙어 있었고, 페이지 수까지 메모되어 있었다. 모두 기석이 남긴 정리법 그대로였다.

‘정확하게 준비하면, 그쪽에서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석이 늘 하던 말이었다. 효진은 그 목소리를 떠올리며 손에 땀이 배는 것을 꾹 참았다. 효진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서류철을 가슴에 껴안은 채 담당자에게로 향했다. 담당자는 꼼꼼히 서류를 훑어보며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효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 이건 부스 사진이네요. 좋습니다. 이 자료까지 포함하면 정산 가능할 거예요.”

"네, 바이어 미팅 리스트는 이쪽에 정리했습니다."

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잘 준비하셨네요. 별도 보완 없이 진행 가능할 것 같습니다."

서류를 제출한 뒤 효진은 문서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였다. 복도 맞은편 로비 쪽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기석 형님, 아니, 한기석 본부장님이 일하시던 그 뷰티스타 코스메틱이라는 회사 맞나요?”

발걸음을 멈춘 효진은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창구 옆에는 전화를 지금 막 끊은 듯 핸드폰을 오른손에 쥐고 있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중년이지만 단정한 슈트 차림에 반듯한 이마선, 깔끔한 회색 뿔테 안경이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효진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저기… 방금 한기석 선생님 말씀하신 건가요?”

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네. 실례지만… 한기석 본부장님 지금 뷰티스타 코스메틱에서 일하고 계신 거 아닌가요?”

“아, 네. 지금은 한 선생님께서 잠시 회사를 떠나셨지만, 같이 일했습니다.”

남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역시, 기석 형님이 다시 무역일을 시작했나 보군요. 그 양반이 원래 현장 체질이에요."

효진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혹시 한 선생님을 잘 아세요?”

“그럼요. 오랜 친구입니다. 사실 제 직속 상사였어요. 사수였었죠. 제 이름은 정기호입니다. 지금은 작은 무역회사 대표로 있어요.”

그는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 효진은 명함을 받아들며 가볍게 인사했다. 그리고 실례인 줄 알지만, 효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기호는 그 질문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마치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말을 고르기 위해 숨을 멈춘 듯했다.

“기석 형님 얘기를 이렇게 꺼내본 건… 참 오랜만이네요.”

그의 시선은 잠시 로비 창밖을 향했다. 창밖엔 봄빛이 흐드러졌지만, 그의 얼굴엔 낯빛 하나 없이 무채색이 어렸다. 그리고 이내 그는 웃었다.

“한기석이라… 한때 ‘무역판의 김연아’였죠. 밸런스 감각, 순간 판단력, 협상 기술… 거기다 늘 냉정했어요. 현장에서 실수 없는 타입으로 유명했죠. 그 별명, 괜히 붙은 게 아니에요.”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효진을 바라보며, 정기호는 말을 이었다.

"한 번은 영국에서 열린 코스메틱 세미나에서 실시간 통역, 자료 번역, 프레젠테이션 피칭까지 혼자 해낸 적이 있었죠.”

“혼자요?”

“네. 3개국 언어를 섞어가며 2시간짜리 미팅을 끌고 갔어요. 그날 이후 업계 사람들 사이에선 ‘링 위에 선 피겨 선수 같다’고, 그리고 그 이후부터 ‘무역판 김연아’라는 별명이 붙었죠.”

효진은 멍하니 그 말을 들었다. 정확하고, 단단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완성형. 그런 평가가 지금까지 자신이 함께 일했던 기석에게 내려졌다는 게, 낯설면서도 어쩐지 뿌듯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차 한잔 하시겠어요?”

효진은 조심스럽게 기호에게 물었다. 기호는 잠시 망설이다, 그제야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 카페, 창가 자리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정기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기석 형님에 대해 궁금하신 것 같네요.”

“네. 솔직히 많이 궁금해요. 저는 그분이 그냥... 항상 조용하고, 깐깐하고... 고집 센 분인 줄만 알았어요. 아, 물론 무역을 하셨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효진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왜 기석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기호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웃었다. 하지만 웃음 끝에는, 오래 묻어두었던 미련 같은 감정이 어른거렸다. 그는 커피잔을 한 번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

“기석 형님 얘기를 이렇게 꺼내본 건, 참 오랜만이네요.”

효진이 조심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정기호는 창밖을 잠시 보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쉽게 이야기 꺼내기 어려운 사람이에요, 그분은. 한때는 무역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조용히 떠날 줄은 아무도 몰랐죠.”

기호의 말투에는 감정이 눌려 있었다. 기석에 대한 존경과 아쉬움, 그리고 미안함까지 뒤섞인 복잡한 정서가 배어 있었다. 그리고 기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깐깐한 것도 맞아요. 고집도 있고요. 그런데 그건, 한 번 무너져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경험에서 나오는 고집이에요.”

효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너졌다고요?”

효진은 숨을 삼켰다. 그가 말하는 ‘무너짐’이라는 단어에서 기석이라는 사람의 모든 무게가 다시 느껴졌다. 기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마치 오래 전의 기억에서 끄집어낸 문장을 읊듯 말했다.

“그 사람이, 아니 기석 형님이 왜 그렇게 디테일을 고집하는지, 제가 직접 본 적이 있어요.”

효진이 그를 바라봤다. 기호는 이제 막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사람처럼,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날 이후, 그는 한 줄의 문장도 가볍게 쓰지 않았어요. 왜냐면 그건 회사 하나를 직접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걸, 스스로 겪었으니까.”

효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정기호는,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이 이야기는... 조금 긴 이야기입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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