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갈등과 폭발, 그리고 잠시 떠난 조력자
미나 하라다가 떠난 다음날, 뷰티스타 사무실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거운 공기가 자욱히 깔린 안개처럼 맴돌았다. 표면상으로는 사무실이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가는 듯 보였지만, 누구도 도현과 기석 사이에 스며든 팽팽한 긴장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도현은 미나 하라다의 대량 주문 건에 대한 내부 전략 회의를 시작하였다.
회의실에 기석, 효진, 유리가 먼저 모였다. 이후 도현이 들어오고, 회의실 문이 닫힌 순간부터, 모두는 알고 있었다. 뷰티스타 코스메틱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이 어제 끝났다는 것만이 아니라, 도현과 기석 사이에도 무슨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효진이 가장 먼저 조심스레 입을 열었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안에서, 기석은 조용히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도현은 회의실 모니터를 켜둔 채, 자리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오랫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커서가 깜빡이는 엑셀 창 위로, 수많은 숫자와 그래프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도현의 눈은 그 숫자들을 읽고 있지 않았다. 도현은 자신에게 조용히 묻고 있었다.
‘미나 하라다의 거래 제안, 그리고 나의 대답, 나의 선택은 정말 괜찮은 선택이었을까? 지금이라도, 말을 돌릴 수 있을까? 미나 하라다에게 메일을 보내서… 조건을 조정하자고 할 수 있을까?’
잠시 뒤, 다른 생각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한 선생님이 틀린 게 아니란 건 나도 잘 알아. 한 선생님의 말처럼, 무역은 마라톤과 같은 장기적인 신뢰 게임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도현은 노트북을 덮지 못한 채 손끝만 가만히 움직였다. 하지만, 이어진 자신의 목소리는 더 단호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어렵게 잡은 바이어의 요청을 거절하면, 다시 이런 기회가 올까? 백상무와의 약속 시간도 다가오고 있어. 국내외 빅 바이어도 없는 우리가… 해외에서 브랜드 인지도를 제고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사무실 한편에서 회의를 기다리는 효진과 유리의 모습이 보였다. 한구석엔 정리된 카탈로그 더미, 프로젝트 캘린더, 아직 반도 꺼내지 않은 샘플 박스들. 도현은 눈을 다시 한번 감았다가 떴다.
‘어쩌면, 지금은 내 자신을 믿는 수밖에 없는지도 몰라. 내 선택을, 그리고... 그 끝에선 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노트북 화면의 밝기가 갑자기 또렷하게 느껴졌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 손을 들어 팀원들에게 말했다.
"그럼, 오늘 미나 하라다 제안에 대한 전략 회의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효진, 유리, 기석은 모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러분, 오늘 비즈니스 미팅은 잘 보셨을 거에요. 미나 하라다 씨는 분명 우리 제품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했어요."
도현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이번 기회를 살리느냐, 놓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있어요."
유리는 조심스럽게 메모를 시작했고, 효진은 노트북을 전원 버튼을 누르며 작게 끄덕였다.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대응 전략을 논의하려 합니다. 대량 생산 계획, 공장 대응력, 포장 자원 확보, 그리고 인력 재배치까지."
도현이 화면을 켜고, 내부 생산 확장안을 스크린에 띄웠다.
"파주 공장은 생산 능력을 1.5배까지는 확장 가능하다는 입장이에요. 주요 원부자재는 예비 공급처와 논의 중이고, 포장 공정은 외주로 일부 분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에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석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회의실 안이 다시 고요해졌다. 도현은 잠시 말을 멈추고 긴장한 눈빛으로 기석을 바라봤다.
"아까 미나 하라다 앞에서 하신 약속, 2주 안에... 정말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팀원들의 시선이 기석과 도현 사이를 오갔다. 도현은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가, 곧바로 답했다.
"한 선생님, 어떤 의도로 말씀하시는지 분명히 이해합니다. 지금 당장은 사실... 미나 하라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유연성이 가장 필요한 시대입니다. 완벽한 준비를 마치고 움직이는 건 옛날 방식이에요. 지금은 기회를 잡은 다음에,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OEM 추가 계약하고, 공장들을 독촉하면..."
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동의의 의미가 아니었다.
"대표님, 저도 기회가 중요하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출은 100미터 단거리 경기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습니다. 뷰티스타 코스메틱은 앞으로가 더, 장래가 유망한 회사입니다."
그는 노트를 덮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지킬 수 없는 약속은 계약이 아니라, 위험한 모험입니다. 모험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도현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겁니까? 상대가 물량을 원하는데, '우리는 준비가 부족합니다'라고 말하자는 건가요?"
"안된다고 말하자는게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원하는 만큼 공급이 어려우나, 확장 계획은 있다, 단계적으로 계약 물량을 늘려 가면 가능하다’는 식의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그건 곧 거절이나 다름없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도현의 이러한 강경하고 흥분한 모습을 한번도 본적없는 효진과 유리는 고개를 들어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석은 도현의 말에 대답했다.
"바이어, 특히 유럽쪽 바이어는 신뢰를 기반으로 움직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브랜드 전체가 흔들리게 될 겁니다. 그리고 겨우 납기를 맞췄다고 가정해봅시다. 급하게 처리한 건들은 분명 실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감당하기 힘든 물량입니다."
이어 기석의 목소리는 더욱 단단해졌다.
"신뢰를 무너뜨리고 얻는 기회는, 결국 독입니다."
회의실 안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효진은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멈췄다. 유리는 펜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효진과 유리는 조용히 그 둘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은 불안에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우린 소중한 기회를 맞았어요.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못 잡습니다. 현실적인 대응 방안은 찾으면 됩니다. 그게 제 역할이고, 이 팀의 존재 이유 아닙니까?"
도현이 책상 위에 손을 짚고 말했다. 기석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한 손은 책상을 짚은 채, 다른 손으로 회의 자료를 쓸어내렸다.
"대표님, 더 이상 제 의견이 무의미하게 들린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도현은 말했다.
"한 선생님. 더 이상 제 판단을 존중하지 않으시겠다면, 대표로서, 그만두시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회의실 공기가 멎었다. 유리는 숨을 삼켰고, 효진은 눈을 크게 떴다. 기석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은 다음 서류를 정리하고 회의실을 나갔다. 그 순간, 그 누구도 기석을 붙잡을 수 없었다.
효진은 키보드 위에서 손을 떼고 책상 밑으로 손을 옮겼다. 유리는 펜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둘은 조용히 회의실을 나가는 기석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이 회사를 다니며, 기석은 든든한 존재였다. 도현이 가진 열정도 좋았지만, 기석의 냉정한 판단과 꼼꼼한 전략은 뷰티스타라는 작은 배를 똑바로 항해하게 해주는 키 같았다.
‘그 사람이, 지금 떠난다면...’
효진은 순간, 그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는 늘 ‘있어주는 사람’이었다. 존재감은 말수가 적을수록 더 크게 다가왔고, 한 번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안심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유리는 고개를 들어 회의실 유리창 너머를 그저 바라봤다. 창가로 번지는 오후의 햇살이 흐릿하게 퍼져 있었다.
‘우리 팀이 이렇게까지 갈라질 줄은 몰랐다.’
유리는 언젠가 도현이 말했던 꿈, "유럽 바이어들이 우리 이름을 먼저 부르게 만들 거야"라는 그 말을 떠올렸다. 그때는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두 개의 엔진이 서로를 밀쳐내는 듯한 팀 분위기에 유리는 처음으로, ‘뷰티스타 코스메틱’의 미래가 불투명할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다음날에도 도현과 기석은 서로를 철저히 외면했다. 사무실과 복도에서 마주쳐도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를 나눌 뿐,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고, 회의 중에도 둘 사이에는 고요한 침묵만이 흘렀다. 팀원들도 변화를 느꼈다. 카페에서 나눈 대화, 사내 메신저에서의 어조, 회의 후의 정적. 모든 것에서 냉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효진은 업무 보고를 할 때마다 긴장했고, 유리는 괜히 실없는 농담을 건네다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 주 금요일 아침. 도현이 출근하자, 기석의 책상이 깨끗하게 비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모니터는 꺼져 있었고, 의자는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 하얀 봉투 한 장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도현은 멈춰 섰다. 발끝에서부터 무언가 차갑게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손끝이 저릿해졌고, 조심스럽게 봉투를 집었다. 열기 전, 문득... 마치 자동 반사처럼,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파리 전시회 첫날이었다. 모든 게 낯설고, 바이어들 앞에서 자신감마저 흔들리던 그 순간에 기석은 말없이 도현의 옷깃을 펴주고, 든든한 아버지처럼 팔짱을 끼고 바이어 앞에 선 채 특유의 미소로 입을 열었다.
‘Mr. Kim is the founder of this brand. I am sure that you’ll want to remember his name soon.’
(이 브랜드의 창립자인 김 대표님이십니다. 아마 곧 이 이름이 익숙해지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 미소는 그날, 도현에게 구명줄 같았다. 그리고 첫 샘플 수출 계약이 성사되었을 때, 모두가 환호하고 샴페인을 터뜨릴 때, 기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어깨를 두드려주던 그 무거운 손의 감촉과 그 모든 장면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처럼 느껴졌다. 도현은 봉투를 천천히 열었다. 서류는 형식적인 문장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짧고 간결한 이별의 예의. 그리고 그 아래,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신뢰는 비용이 아니라, 자산입니다.”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도현의 가슴 깊은 곳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지금껏 버티고 있던 감정의 둑이, 그 짧은 한 줄로 무너진 것만 같았다. 그는 봉투를 든 손을 가만히 내렸다. 그리고 텅 빈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의자의 주인이 없어진 자리, 코드가 빠진 모니터, 정리된 파일박스. 모든 게 정도되어 있었지만, 그곳엔 기석의 흔적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 오후, 도현은 혼자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하얀 벽면,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그리고 반쯤 비운 커피잔. 기석이 앉았던 자리는 깨끗했지만, 왠지 더 허전하게만 보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제서야, 처음으로 자신의 판단이 과연 옳았는지를 천천히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