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rade: 무역왕 김스타 33화

다시 시작된 파트너쉽

by 이설아빠

이른 아침, 서울 외곽의 낡은 상가 건물들. 회색빛 콘크리트 사이로 겨우 스며든 햇살이 조용히 벽을 타고 내려왔다. 아직까진 제대로 된 사무실 간판 하나 달려 있지는 않았지만, 오늘 만큼은 무언가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 뷰티스타 코스메틱 사무실의 공기엔 묘한 긴장감과 변화의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불이 켜진 건 오전 6시 47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도현은 그 누구보다 빨리 도착했다. 도현은 문을 열자마자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있던 마커펜을 잡는 그의 손이 전보다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방향을 잃은 사람이 아니었다. 회의실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또박또박,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장을 적었다.

“뷰티스타는 이제부터 브랜드다. 그리고 시스템 없는 약속은 무책임이다.”

조용한 실내에서는 화이트보드에 마커펜이 스치는 소리만 울렸다. 글씨가 완성되자 그는 몇 발짝 물러나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약간은 오글거린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도현의 눈빛은 결심과 책임이 섞인 어떤 무게를 품고 있었다. 잠시 뒤, 사무실 문이 열렸다. 갑자기 진한 커피 향이 사무실을 휘감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네 잔을 들고 들어선 이는 효진이었다. 여느 때와 달리 머리는 단정히 묶여 있었고, 목에는 얇은 체크무늬 스카프가 걸려 있었다.

“대표님, 오늘 회의 시작 멘트에요?”

그녀는 커피 향과 함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다른 커피 하나를 도현에게 건넸다. 커피를 건네받은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제 우리는 단순히 제품을 파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뷰티스타 코스메틱'이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야겠죠.”

효진이 커피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곧이어 유리가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기석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도착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사무실 공기가 한 번 바뀌는 듯했다. 오랜만에 팀이 모두 모였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지금의 그들은 다시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이자 시스템’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도현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팀 회의를 시작했다.

“오늘부터 우리는 시스템을 갖춘 기업이 되고자 합니다. 장사가 아닌,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반복 가능해야 합니다. 그리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기석이 노트북을 켜며 말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국가별 인증 요건과 통관 패턴, 그리고 거래 조건별 리스크 요약본입니다.”

그는 가방에서 A4 종이를 꺼내 펼쳐 보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프랑스, 독일, 태국… 각국의 바이어들이 보낸 이메일에서 공통적으로 추출한 요구사항이 한 줄씩, 그러나 빼곡하게 요약되어 있었다.

“국가별 바이어들이 주로 요구하는 인증과 통관 조건을 정리했습니다. 단순한 목록이 아니라, 실제 상담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패턴 위주로 정리했습니다."

기석은 잠시 숨을 들이킨 다음 말을 이었다.

"인도네시아 바이어는 'CFS'라고 부르는 자유판매증명서를 요구하는 비율이 높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현지 유통업체 등록 후에 통관을 요청하죠. 프랑스는 CPNP 등록 후 DDP 조건을 기본적으로 요구합니다.”

“CPNP 등록, 이거 등록하느라 힘들었죠.”

도현이 작게 말했다. 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의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국가별 선호 인코텀즈 조건 및 리스크’가 적혀 있었다.

“수출은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조건을 판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닙니다. 대표님, 이건 꼭 알고 가셔야 합니다.”

기석이 책상 위의 얇은 프린트 몇 장을 다시 꺼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바이어가 요구하는 조건들, 겉보기엔 단순히 ‘배송은 언제까지 해줄 수 있냐’, ‘운임은 포함이냐’ 같은 질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우리가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할 ‘인코텀즈’라는 국제 규칙이 숨어 있습니다.”

“인코... 텀즈요?”

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석은 한 장의 도표를 도현 앞으로 밀었다.

“정식 명칭은 Incoterms, International Commercial Terms. 국제상업회의소에서 만든, 글로벌 무역 거래를 위한 표준 계약 조건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FOB, CIF, DDP 같은 약어들이 전부 이 인코텀즈 규칙에 기반한 것입니다.”

도현이 조심스레 도표를 넘겼다. 각 조건마다 ‘누가 배송비를 내는지’, ‘어디서 인도 의무가 끝나는지’, ‘위험과 책임은 언제 넘어가는지’가 한눈에 정리되어 있었다. 기석이 설명을 이어갔다.

“예를 들어 ‘FOB 부산항’이라고 적히면, 우리가 부산항까지 물건을 실어 보내고, 선박에 싣는 순간 인도가 완료됩니다. 그 이후의 위험과 비용은 전부 바이어가 지게 됩니다. 반면 ‘DDP 파리’라면, 프랑스 현지까지 우리가 전부 책임져야 하는 겁니다. 배송비, 보험, 통관, 관세까지.”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거... 계약서에 조그맣게 한 줄 들어가는 게 전부 아니에요?”

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그 한 줄에 따라 우리 손익이 크게 좌우됩니다. 실무에서는 이걸 모르고 수락했다가, 물류비 폭탄을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현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 지난번 마티유 드랑과의 계약서 초안이 떠올랐다. 그땐 기석이 도와줘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통관 지연의 책임까지 전부 자신이 떠안았을 것이다.

“결국, 인코텀즈를 이해해야 무역 계약의 리스크를 읽을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제품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파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디까지 책임지는지, 어느 시점에 리스크를 넘기는지를 아는 게 신뢰를 지키는 기본입니다.”

기석의 말에 사무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한 줄 한 줄이 낯설지 않았다. 과거의 실패가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이어서 효진이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그녀가 만든 ‘CS 응답 프로토콜’은 놀랄 만큼 잘 정리되어 있었다.

“1차 회신은 24시간 이내, 제품군 및 이슈 유형별로 대응 매뉴얼을 달리 구성했어요. 인증 관련 질문은 한 선생님께 바로 연결되게 했고요, 언어별 표현도 정리했어요. 현재는 영어를 중심으로 제작되어 있지만, 나중엔 프랑스어, 일본어까지 추가하면 좋을 것 같아요.”

유리가 기다렸다는 듯 구글 시트를 열어 보여줬다. ‘뷰티스타 CRM_초안’이라는 이름의 문서였다.

“CRM은 구글 시트 기반으로 정리했어요. 바이어 이름, 국가, 제품 관심군, 인증 요구사항, 클레임 이력, 거래 규모 예상치가 포함되어 있어요. 자동 필터를 넣었고, 응답 우선순위도 정리됐어요. 간단하지만, 흐름이 보이더라구요.”

“이런 것들이 예전엔 우리에게 없었던 거죠.”

도현은 천천히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엔 누구 하나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시스템은 사람보다 오래가야 합니다.”

그 말에,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과거의 뷰티스타는 ‘제품이 좋으면 팔린다’는 순진한 믿음으로 운영되었다. 글로벌 유통 채널 하나 제대로 없었고, 수출 계약서도 누가 어떤 조건으로 체결했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매뉴얼이 생겼고, 사람이 아닌 시스템이 기억하기 시작했다.

“브랜드는 약속이자 신뢰입니다.”

도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그 약속은 감정이 아니라 반복이에요. 우린 그 반복을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를 갖춰야 해요.”

회의가 끝난 뒤, 기석은 도현을 불러 세웠다.

“대표님, 요즘은 예전과 많이 달라 보입니다.”

“좋은 뜻이죠?”

기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미묘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실망과 희망이 뒤섞인, 오랜 시간 옆을 지켜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날 오후, 도현, 기석, 효진은 포장재 샘플을 앞에 두고 의견을 나누었다. 새 패키지는 기능 설명 대신 ‘신뢰’와 ‘진심’이라는 키워드가 눈에 띄었다. 언어는 영어였지만, 내용은 통했다.

“지금은 영어와 한국어만 있지만, 앞으로 여섯 개 언어가 더 추가되면 좋겠어요.”

효진이 말했다.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인도네시아어, 한국어.”

“6개 언어가 아니라 6개 감성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석이 답했다.

“같은 말도, 뉘앙스는 다르니까요.”

그날 저녁, 도현은 홀로 사무실에 남아 CRM 시트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유리의 시트에 자신이 직접 메모를 더했다. 바이어별 성향, 응답 속도, 통화할 때 느껴졌던 말투의 온도. 그런 건 시스템에 안 들어가지만, 그는 알고 싶었다. 문득 도현은 ‘브랜드’라는 말이 떠올랐다. 전엔 ‘고급 포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브랜드는 신뢰의 총합이었고, 반복되는 행동의 결과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스템으로 유지되는 철학이었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그는 마지막으로 화이트보드를 바라보았다.

“약속은 시스템으로, 신뢰는 반복으로.”

그 아래에 또 한 줄이 추가되었다.

“우리는 오늘도 브랜드가 되는 중이다.”


사무실을 정리하고 난 뒤, 도현은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손에는 차가워진 커피가 들려 있었고, 화면엔 CRM 시트가 아직도 떠 있었다. 유리가 남긴 필터를 따라 몇 개의 바이어를 클릭하던 손이 멈췄다. 그리고,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서지우’.

잠시 망설였다. 시계는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화는 걸지 말아야 했지만… 그녀가 문득 떠올랐다. 파리에서 지우가 했던 말.

“언제든지, 혼란스러우면 연락해요. 나는 괜찮으니까.”

그 말이 떠올라, 그는 조심스레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린 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이 시간에… 무슨 일 있어요?”

졸음이 덜 가신 듯한 목소리. 하지만 놀라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그냥요, 목소리 듣고 싶었어요.”

도현은 웃으며 말했다.

“근데 그건 핑계고… 사실은, 말하고 싶었던 게 있어서요.”

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다는 듯, 그리고 도현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미나 하라다와의 계약, 잘못됐어요.”

“…”

“우리가 너무 서둘렀고, 저는... 그걸 몰랐어요.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했는지도 모르고요.”

조용한 고백처럼 울리는 목소리였다.

“한 선생님은, 돌아오셨어요?”

“네, 다행히 돌아오셨어요. 예전에 한 선생님이 하셨던 말, 다 맞았어요. 시스템 없이 버틴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어요. 나는 너무 많은 걸 감정으로 판단했고, 믿음에만 맡겼어요.”

"근데... 그걸 인정할 수 있다는 건, 꽤 멋진 일 아닌가요?”

지우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자책하는 도현을 감싸는 얇은 담요처럼.

“지우 씨, 나는 브랜드가 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이건 포장이 아니라, 반복이더라고요. 그리고 시스템이에요. 나 하나가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약속이 유지되려면 구조가 필요해요.”

“도현 씨는, 많이 달라졌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예전엔 모든 걸 혼자 안고 가려했잖아요. 근데 지금은… 사람을 믿고 있네요.”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야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서.”

도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우는 말없이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근데, 그런 도현 씨… 지금은 혼자죠?”

지우의 웃음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말은 달랐다.

“아니요. 혼자인데, 혼자 같진 않네요.”

그 말에 지우는 작게 웃었다.

“다행이에요. 혼자 있는 도현 씨, 보기 안 좋거든요.”

지우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힘들거나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요. 나는 언제나 옆에 있을 거니까.”

통화가 끝난 뒤, 도현은 다시 한번 화이트보드를 바라봤다. 마커로 적힌 문장 아래, 조용히 속으로 또 한 문장을 덧붙였다.

“그리고, 신뢰는 사람 간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그 문장은 적히지 않았지만, 도현의 마음에 가장 선명하게 남았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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