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 하라다와의 진짜 계약, 그리고 확장
뷰티스타 코스메틱 사무실의 낡은 블라인드 틈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 무렵, 도현은 이미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이메일 창을 열어 놓은 채, 그는 연신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오늘 안에 답이 오겠지.’
며칠째 반복된 그 말이 오늘 만큼은 달라 보였다. 그는 모니터에 표시된 시차 계산기를 다시 확인했다. 베를린과 서울은 7시간 차이. 지금이 한국 오전 10시라면, 베를린은 새벽 3시였다.
“그래. 아직 일어날 시간은 아니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커피잔을 집어 들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도현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CRM 시스템을 기반으로 정리된 바이어 피드백은 그들의 대응을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노력들이 결실을 맺으려면 단 한 사람, 미나 하라다의 ‘사인’이 필요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어요.”
며칠 전, 효진이 조심스럽게 말했을 때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석도, 유리도 더는 반복할 수 없는 고비라는 걸 알고 있었다.
미나 하라다 그녀는 일본계이지만, 독일 베를린에 본사를 둔 뷰티 유통사의 유럽 총괄 바이어였다. 유럽 전역 18개국에 뷰티 제품을 공급하는 이 회사는 까다롭기로 악명 높았고, 미나 하라다는 그 안에서도 ‘끝판왕’으로 통했다. 초기엔 희망이 보였다. 파리 박람회에서 우연히 부스를 들른 그녀는 뷰티스타 제품에 흥미를 보였고, 샘플 요청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도현의 서툰 대응과 무리한 거래 조건 제안을 수용하면서, 신뢰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협상은 중단되었고, 도현의 진심어린 사과로 잘 마무리 되는 듯 싶었으나, 그 이후 거래에 대한 진전은 없었다.
도현은 며칠간 사무실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모니터를 켜도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팀원들의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면 누군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 텐데, 이번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가 그 기회를 기다려왔고, 모두가 그것이 무산됐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실 한쪽, 기석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앉아 있었다. 도현이 말없이 자리를 지키는 동안 기석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건 실패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한계를 확인한 겁니다. 너무 실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표님.”
도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기석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엔 분명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실패라는 단어는 끝에 쓰는 겁니다. 우린 아직, 끝에 도달한 게 아닙니다.”
효진은 입술을 깨물며 회의록 파일을 닫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도현을 바라보다가, 작게 말했다.
“대표님, 저희 아직... 괜찮아요.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효진의 눈동자엔 흔들림보다 의지가 먼저 비쳤다. 효진은 미련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가능성을 말하고 있었다. 유리는 침묵을 오래 지켰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갈 무렵,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렇게 말했다.
“저, 그동안 미나 하라다 씨와 회사 분석 자료 따로 정리해뒀어요. 커뮤니케이션 스타일도, 반응 시점도 패턴이 있어요. 다시 보내봐요. 그냥 끝내지 말고.”
그 순간, 도현의 마음에 처음으로 작은 틈이 생겼다. 무너진 기회 속에서도,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그 틈은 곧 '변화'라는 이름의 계획으로 이어졌다. 도현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사과는 사과로만 끝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변화로 보여줘야 합니다.”
기석의 조언에 따라, 뷰티스타는 시스템부터 고쳤다. 제품의 전성분을 유럽 시장 기준에 맞게 정리했고, 언어별 매뉴얼과 CS 체크리스트를 새로 구축했다. 유럽 내 클레임 대응 메뉴얼도 CRM에 반영되었고, 무엇보다 바이어별 커뮤니케이션 이력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처음엔 짧은 회신만 보내왔다.
“Understood.”
(이해했습니다.)
“No additional samples are required at this time.”
(추가 샘플 요청은 이번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답장이 차츰 길어졌다.
“The recent packaging renewal shows noticeable improvements.”
(최근 진행된 패키지 리뉴얼에서 의미 있는 개선이 확인됩니다.)
“Your customer service approach has clearly changed from before.”
(고객 서비스 접근 방식에서도 이전과는 분명한 변화가 느껴집니다.)
기석은 그걸 ‘신뢰 회복의 신호’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아침 10시 27분. 도현은 마침내 그 메일을 받았다. 도현은 순간, 마우스를 움켜쥔 손을 놓칠 뻔했다. 심장은 귀까지 뛰었다. 단 몇 줄, 하지만 그 몇 줄이 지난 힘든 기간들을 구원하는 순간이었다. 메일 제목은 단순했다.
[Mina Harada - Contract Confirmation]
(미나 하라다 – 계약서 확정 안내)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도현은 손끝으로 마우스를 천천히 움직여 메일 본문을 클릭했다. 화면에 펼쳐진 건 단 네 줄의 메시지였다.
“Dear Mr. Kim, As discussed, please find attached the signed contract for our first 6-month regular order. Let’s make this the beginning of a sustainable partnership. Mina Harada”
(김도현 대표님께,
논의한 바와 같이, 첫 6개월간의 정기 주문 계약서에 서명하여 첨부드립니다. 이번 계약이 지속 가능한 파트너십이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미나 하라다 드림)
도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며 PDF 파일을 열었다. 계약서 마지막 장, 도현의 서명이 왼쪽 하단에, 그리고 오른쪽에는 Mina Harada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한 선생님... 효진 씨... 유리 씨...”
도현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왔습니다... 계약서, 드디어 사인 받았어요.”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조용하던 사무실, 이내 효진이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유리는 입을 틀어막은 채 눈시울을 붉혔다. 기석은 노트북 화면을 덮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도현에게 다가와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드디어 진짜로 해내셨습니다.”
“이건... 우리가 다 같이 한 거예요.”
도현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말도 없이, 눈물도 참지 않은 채, 몇 초간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공간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이 흘렀다. 실패의 기억을 견뎌낸 사람만이 나눌 수 있는 눈물, 함께 고생하며 회복한 신뢰를 몸으로 느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침묵이었다.
그날 오후, 도현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계약 내용을 하나하나 검토했다.
6개월 단위 정기 오더, 유럽 4개국 우선 입점
1차 발주 수량은 1만 2천 개
총액 28만 유로
배송 조건: DAP 파리, 인증 및 통관 책임은 뷰티스타 코스메틱 부담
모든 항목은 이미 숙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계약서에서 ‘뷰티스타 코스메틱’이라는 이름이 9번이나 등장했다. 효진은 도현이 내려놓은 계약서를 들여다보며, 마치 귀한 유물이라도 보는 듯 눈을 반짝였다. 계약서를 보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입을 떼었다.
“이제는... 남한테 자랑할 수 있어요. 뷰티스타는 글로벌 브랜드라고.”
잠시 흐뭇한 기류가 흐르다, 도현은 다시 눈빛을 다잡았다.
“이제부턴 진짜 프로처럼 일해야 해요. 대응도, 문서도, 고객 관리도. 이런 계약이 이어지려면 그만큼 무서운 각오가 필요하잖아요.”
효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단순한 다짐이 아니라, 지난 몇 달 간의 시행착오에서 비롯된 각성처럼 들렸다. 그때 기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 계약은, 운일 수 있습니다.”
익숙한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다음 문장이 이어졌다.
“두 번째부터는... 실력이 증명합니다. 계약은 시작이지, 절대 끝이 아닙니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열정으로 들끓는 게 아니라, 단단히 눌러 담은 책임감 같은 공기였다. 한 발 내디뎠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돌아갈 수는 없는 길이었다. 도현은 자리에 앉았다.
“하나하나 다 우리가 버텨낸 결과야. 이제서야 진정한 수출 기업이 된 것 같네.”
혼잣말처럼 내뱉은 그 말에 기석은 조용히 웃었다. 기석은 도현 맞은편에 서서 차분히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기석은 머그컵을 도현 앞에 놓으며 말했다.
“대표님, 그때 기억나십니까? 저랑 처음 만났을 때.”
도현은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네. 그때는 무역이 멋있는 것인 줄로만 알았죠. 지금은... 알고 나니 오히려 무섭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해요. 근데 진짜 하고 싶어요. 뷰티스타 코스메틱을 지키고 싶거든요.”
기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없이 자신의 노트를 꺼내 새 페이지를 펼쳤다. 그 위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시스템 없는 신뢰는 우연이고, 반복 없는 약속은 구호에 불과하다."
그들은 이제, 브랜드가 되고 있었다.
그날 밤, 사무실은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하지만 창가 쪽 회의실만은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도현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번호부에서 ‘서지우’라는 이름을 천천히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지우 씨, 저 김도현입니다.”
“알아요. 이 시간에 전화하신 거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둘 중 하나겠죠?”
“좋은 쪽이에요. 아주 좋은 쪽.”
그 말에 지우는 짧게 웃었다.
“말씀해보세요. 무슨 일인데요?”
도현은 잠시 숨을 고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나 하라다 씨, 기억하시죠? 파리 박람회 때 처음 만났던 그 바이어.”
“기억하죠. 대표님 때문에 계약 놓쳤다고 하셨던 분 아닌가요?”
“그분께 오늘... 계약서에 최종 사인 받았습니다.”
“정말요?”
지우의 목소리에 놀람과 기쁨이 뒤섞였다.
“6개월 정기 오더에요. 유럽 4개국 유통 계약. 수량도, 조건도 우리 이제 정말 ‘수출 기업’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입니다.”
전화기 너머로 한동안 조용한 숨소리만 들렸다. 그러다 지우가 천천히 말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도현은 말끝을 맺으며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지우 씨한테 너무 모자란 모습만 보여드린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네요. 회사 무너질 것 같았고, 저 자신도 너무 한심해서… 괜히 지우 씨한테...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네요.”
지우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시간들이 있었으니까, 지금 여기까지 오신 거겠죠. 대표님은 더 멀리 가실 거라고 믿어요.”
그 말에 도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말 없이도 위로가 되는 사람, 그게 지우였다.
“조만간 다시 뵙죠. 식사라도 한 끼... 오늘은, 진심으로 축하받고 싶은 날이라서요.”
“네, 이번엔 제가 살게요. 진심으로 축하해드리고 싶어요.”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도현은 조용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창밖엔 여전히 서울의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계약서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그 순간,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았다. 그는 어느 덧 브랜드의 얼굴이자, 회사를 이끄는 진짜 대표였다. 그리고 뷰티스타 코스메틱은 글로벌 유통을 향한 진짜 항해를 시작한 '진짜' 수출 기업이 되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