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무와의 약속
오늘따라 유난히 서울의 밤거리가 더 아름다워 보였다. 도현은 까만 수트를 입고 강남 도심의 호텔 라운지 한켠으로 들어섰다. 창가 쪽, 붉은 조명 아래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백상무였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대신 습관처럼 셔츠 맨 윗단추를 풀어두고, 오른손엔 얼음이 든 위스키 잔을 들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백상무님.”
도현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백상무는 잠시 시선을 창밖에 두었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김대표. 잘 지냈어?"
평소 백상무 답지 않게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김 대표. 너한텐... 많이 길고 힘든 시간이었지?”
그 말 한마디에는 지난 12개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6개월 간의 첫 유예기간 이후, 또 한번의 유예기간. 그 동안 도현은 많은 일을 겪었고, 달라져 있었다. 백상무도 예전과는 달라 보였다. 짧은 농담도, 비꼼도 없었다. 이 만남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고, 도현도 그걸 알고 있었다. 백상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실은 말이야, 김대표. 아니 도현아, 난 네가 못 해낼 거라고 생각했어. 그땐 그냥, 형식상 투자 유지하려고 한 거였어. 6개월? 솔직히 말하면, 끝맺을 구실로 던진 거래 같은 거였지.”
도현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왜 그토록 실적을 다그쳤는지, 왜 한 번의 미팅 연기에도 불쾌감을 드러냈는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창업 초기, 아무 것도 없는 팀에 돈을 넣는다는 건 어쩌면 투자라기보다 ‘인내심의 시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상했어요. 상무님 눈빛이 어느 시점을 넘어가니, 늘 말해주더라고요. ‘언제 끝낼까’ 그 생각이셨죠.”
도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큭, 그렇지.”
백상무가 크게 웃었다.
“그래도 인정은 해야겠더라. 너... 많이 바뀐 게 느껴져. 지난 회의에서 PPT 넘기는 손이 예전이랑 많이 다르더라. 뭔가 확신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그는 도현의 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말했다.
“마티유 드랑? 초도 물량 500, 추가 2,000? 미나 하라다? 유럽 4개국, 6개월 정기 오더, 28만 유로. 솔직히 규모는 크다고는 못 해. 근데 이 계약들이 말해주는 게 있어. 너가 운영하는 회사, 아니 뷰티스타가 ‘해외 기업들과 거래가 가능한 조직’이 됐다는 거야.”
도현은 그 말에 목이 조금 메였다. 단순히 계약이 성사됐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조직’이라는 단어를, 이 깐깐한 투자자의 입에서 처음으로 듣는 순간이었다. 단순한 ‘창업자 개인’이 아니라, 기업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감사합니다. 저희, 아직 작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시작이네.”
백상무가 잔을 들었다.
“그래서 더 무섭지.”
“예?”
“진짜 사업은 이제부터야. 무에서 유를 만드는 건... 사실 재능과 유능한 서포터가 필요해. 근데 유를 지키는 건 인내야. 고객 관리, 리스크 관리, 현금 흐름, 재고. 정신 나가 보이는 디테일들의 전쟁이지.”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디테일들, 요즘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백상무는 등을 젖히고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처음엔 코스메틱이 유망하다고 해서, 실적 보려고 투자했어. 그 다음엔 투자금 회수할 핑계를 찾았고. 근데 지금은... 그냥 지켜보고 싶어졌어. 어떻게 이 브랜드가 세계로 뻗어나가는지.”
도현은 눈을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쌓인 긴장감이 조용히 풀리는 듯했다.
“백상무님께 그런 말씀 들으니... 참, 이상하네요. 처음엔 미움도 많이 샀다고 생각했는데.”
“미움 맞았어.”
백상무가 웃으며 고백했다.
“기대한 적도 없는데 괜히 기대하게 만들고, 보고서 볼 때마다 엉망인 숫자에 열 받았고. 회사에선 얼마나 쪼아대는지. 왜 그런 회사에 투자를 했냐고. 근데 희한하더라고. 넌 사람한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어.”
“그게 좋은 건가요?”
“좋은 거지. 초기 투자는 숫자야. 하지만 지속되는 투자는 사람에게 가는 거야. 너는... 처음으로 그 기준을 넘었어.”
도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지속되는 투자는 사람에게 간다... 정말 좋은 말이네요.”
백상무는 고개를 돌려 도현을 바라봤다.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창업이라는 게 참 웃긴 거야.”
그는 잔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누구나 처음에는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도는 줄 알았겠지. 좋은 아이템만 있으면, 좋은 팀만 꾸리면, 고객은 따라오고 시장은 반응한다고 믿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너무 잘 아는 이야기였다.
“내가 만났던 창업자 중에도, 진짜 번뜩이는 놈들 많았어. 보고서 하나만 보면 ‘이건 된다’ 싶은 애들. 근데...”
백상무는 잠시 잔을 내려놓고 도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빛이 잠시 날카로워졌다.
“근데 도현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어.”
그의 목소리는 조금 더 진지해졌다.
“창업자들 중에 말이지... 기술 하나 들고 나와선 ‘이건 무조건 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어. 시장은 신경도 안 쓰는데. 근데 그런 사람들이 꼭 말하는 게 있어. ‘이 기술은 세계 최고’라던가, ‘이 기능을 가진 경쟁사에 없다’ 같은 거.”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이야기였다.
“근데, 시장은 기술을 사는 게 아니야. 문제를 해결해주는 도구를 사는 거야.”
백상무는 손가락을 두 번 책상에 두드렸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소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면, 그건 그냥 비싼 장난감일 뿐이야.”
“맞아요. 저희도 초반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좋은 제품’을 만들었지,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진 않았어요.”
도현이 조용히 덧붙였다.
“그거야. 기술력 만으로 밀어붙이려는 사람들 중 90%는 결국 실패해. 제품이 안 팔려. 왜냐면, 고객은 ‘기술이 뛰어난 제품’보다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해결해주는 그런 제품’을 원하거든. 그게 5성급 기능이든, 3성급 디자인이든 상관없어. 소비자 입장에서 느껴지는 ‘정확도’가 더 중요해.”
그리고 백상무는 위스키를 한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제품을 시장에 파는 능력, 마케팅 능력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특히, 4P 알지? 오래된 마케팅 기본 중에 기본이잖아. 이 기본을 무시하고는 시장에서 성공할 수 없어."
그말에 도현은 숨을 들이켰다.
“음... 기술을 사랑하는 건 좋지만, 기술에 취하면 안 된다. 이 말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백상무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기술은 수단일 뿐이고, 제품은 시장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해. 그러니까, 뷰티스타 코스메틱도 계속 제품 좋다는 말보다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왜 필요한지’를 고객에게 먼저 전달할 필요가 있다는 거야.”
도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제품 카탈로그도 다시 봐야겠네요. 기능 설명이 아니라... 고객이 궁금해 할 질문부터 먼저 던져야겠어요.”
“맞아.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대표는 오래가.”
백상무는 잔을 비우며 말했다.
“기술보다 중요한 건 방향이고, 기능보다 중요한 건 그 의미야. 고객이 느끼는 그 ‘의미’가 곧 브랜드가 되는 거지. 결국 이를 무시한 창업자들은 대부분 2년을 못 버텼어."
백상무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창업기업이 2년을 못버티는 이유는 그거더라. 외로움. 말 못 하는 외로움.”
그의 눈빛이 어딘가 허공을 향했다.
“누구한테도 티를 못 내. 직원한텐 늘 괜찮은 척 해야 하고, 고객 앞에선 완벽해야 하고, 투자자 앞에선 전쟁 나도 매출 오른다 그래야 하고. 그런 시간이 쌓이면 사람이 무너지게 되어 있어.”
도현은 조용히 잔을 만지작거렸다.
“맞아요... 저도, 그런 순간이 있었어요.”
백상무는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
“너, 언제가 제일 힘들었냐?”
도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첫 유예기간 막바지였어요. 팀은 지쳐 있었고, 계약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고... 그날, 보고서 쓰다가 문득 ‘내가 대표가 맞나?’ 싶더라고요.”
도현은 조용히 웃었다.
“그날은 진심으로... 모든 걸 놓고 싶었어요. 아무도 모르게, 그냥 사라지고 싶었어요.”
백상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지나니까, 뭐가 달라졌냐?”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한 선생님, 효진, 유리... 다 껴안으려고 했고, 뭘 잘못했는지도 솔직히 말했어요. 그러니까 좀 달라지더라구요. 이상하죠?”
“아니. 그게... 진짜 조직이라는 거야.”
백상무는 다시 잔을 들었다.
“사업은 원래 외로운 거야. 근데 팀을 만든다는 건, 그 외로움을 나눌 수 있게 하는 작업이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결국 회사를 지키고 굴러가게 만들어. 그래서 조직 구성원 하나하나가 중요한거야.”
도현은 백상무의 말을 곱씹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수출을 잘하고 싶었어요. 매출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깐. 근데 요즘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백상무는 그 말에 조용히 웃었다.
“대표가 그런 생각 하기 시작했으면, 이미 반은 넘은 거야.”
그 말에 도현은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잔잔한 음악이 흘렀고, 도심의 불빛이 창문에 일렁였다. 긴 침묵 끝에 도현이 물었다.
“그럼... 이젠 저, 믿으시나요?”
“믿고 말고가 아니라...”
백상무가 잔을 비우며 말했다.
“이젠 그냥, 기대가 돼. 네가 뭘 할지. 그래서 오늘은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 말에 도현은 조금 웃었다. 그토록 냉정하던 투자자의 입에서 나온 ‘고맙다’는 말, 그건 단순한 고맙다는 말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기업에게 건네는, 일종의 존중같이 들렸다.
“저도 고마웠어요. 기회 주셔서.”
“됐고, 앞으로 6개월은 너 혼자서도 충분히 이끌 수 있겠지?”
“이제는...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을 알게 된것 같아요.”
백상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난 더 이상 너하는 일에 간섭 안 할게. 대신 하나만 약속해.”
“뭔데요?”
“지금 너 같은 창업자가... 나중에 누군가한테 투자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길. 그게 투자자로서는 제일 큰 보상이니까.”
호텔을 나서며 도현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 차가움조차 반가웠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도심의 불빛은 여전히 바빴고, 사람들의 표정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도현의 눈엔, 오늘의 서울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다.’
도현은 늘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다. 그걸로 지금까지는 버텼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팀원들, 고객들, 그리고 브랜드의 이름으로 기대를 거는 이들까지. 이제 그는 누군가의 기대가 아니라, 누군가의 약속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뷰티스타가 어떤 브랜드가 되어야 할까.’
도현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단순히 예쁜 제품을 만드는 회사? 고기능성 화장품을 수출하는 무역회사? 아니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욕망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상을 바꾸는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
화장대 앞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시간. 그 짧은 루틴이 더 건강하고, 기분 좋고, 자존감 있게 느껴지도록 도와주는 브랜드. 그게 뷰티스타 코스메틱의 철학이어야 한다고, 도현은 확신했다.
“좋은 제품은 많다. 하지만 진심이 담긴 제품은 드물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휴대폰을 꺼내 잠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백상무의 연락은 없었지만, 이제 그는 다음 전화를 누구에게 걸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다음 단계엔, 어떤 조력자가 필요할까.’
기석이 구축한 시스템은 기반이 되었고, 효진과 유리의 노력은 팀을 움직였다. 이제는 ‘브랜드’를 확장하고, 글로벌 파트너를 직접 설계할 수 있는 전략 파트너가 필요했다. 해외 법인 설립? 공동 브랜드 개발? 현지 매니지먼트?
그는 아직 정답을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 물음조차 두렵지 않았다. 도현은 길을 건너며 마지막으로 창밖의 호텔 라운지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백상무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잔을 굴리고 있었다.
‘이제, 여기에 얽매일 이유는 없어.’
도현은 속으로 되뇌었다. 바람이 불었다. 봄밤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이제 그 바람은 도현에게 추위가 아니라, 추진력이었다.
“우린, 만들어가고 있다.”
도현은 작게 중얼이며, 밤거리를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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