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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Mar 18. 2024

난 웃긴 애하고 친구야

작년에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나에게 작은 고민이 생겼다. 학교의 출석번호 배정 방법이 너무 구시대적인 거다. 남자부터 1번 ㄱㄴㄷ, 그다음에 여자 ㄱㄴㄷ 순서로 출석번호를 줬다. 시내 모든 학교 중에 우리 애가 입학한 학교만 그랬다. 다른 초등학교는 성별 구분 없이 ㄱㄴㄷ순으로 출석번호를 줬는데.


성별에 대한 인식-젠더 정체성-이 여자 남자로 딱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왜 사람을 두 가지로만 나눠서 줄 세우 하는지. 밥 먹을 때부터 달리기 할 때, 놀이터 나갈 때까지 남자 여자 딱 나눠서 남자 먼저 나가고 그다음에 여자 출석번호순으로 나간. 그러다 보니 반에서 애들이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하고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노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남자애들은 딱지치기하고 여자애들은 종이접기 하고 그런 식. 학교 전체에 2개밖에 없는 그네는 당연히 남자애들 차지다. 먼저 운동장에 나가니까. 이러니 자꾸 성별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다.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용기를 내서 왜 성별로 출석번호를 구분했냐고 학교에 문의했다. 그러 돌아오는 답변. 남자 먼저 번호를 줘서 문제냐고, 그러면 내년엔 여자 먼저 번호를 주겠단다.

내가 여자남자 순서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다, 아이들을 성별로 나누는 게 반-교육적이라 생각한다, 성별은 2개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립관계도 아니라 생각한다고 말했더니 '이 아줌마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하는 분위기였다.


'아줌마'가 말해서 말발이 안 서나 싶어 학부모상담기간에 배우자 등판시켰다. 담임선생님께 출석번호에 대해 건의하고 성별로 애들을 나누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더니 자기 소관이 아니라신다.


그래서 마지막 수단으로 학교 평가 기간에 먹먹문을 써냈다. 아이들 출석번호 배정 방법을 중립적인 방법으로 바꾸어달라고. 그렇게 해도 행정상 불편이 전혀 없다고 여러 사례를 들어 길게 썼다.

그러고 나서 받은 학교 측 답변은 '출석번호를 무작위로 배정할 수는 없다'는 거였다. 성별로 번호 안 주면 죽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지. 성별 구분 번호만이 '무작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시대착오적이지 않나. 가슴이 답답했다.


주변에 이리저리 알아보니, 3년 정도 지속적으로 건의해서 마침내 학교가 바뀌었다는 사례담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올해는 마음을 놨다. 그래. 둘째 입학할 때쯤 바뀌겠지. 그때까지 열심히 건의해 보자.


고 오늘. 긴긴 겨울 방학의 마지막 날. 적응도 할 겸 학교 운동장으로 애들이랑 놀러 나갔다. 아무 생각 없이 중앙현관 쪽을 지나오는데 반 배정표가 붙어있는 거다. 헉! 눈이 번쩍 띄었다. 찬찬히 목록을 살펴보다 보니 곧 온 마음에 뜨끈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번호가 성별 구분 없이 ㄱㄴㄷ순으로 배정된 거다.


 3년건의할 생각이었는데 정말, 정말 기뻤. 남들한텐 별거 아닐 수 있겠지만 나에겐 일상의 작은 승리였다. 아이들이 가질 성별 편견을 조금이라도 줄이는데 일조한 것 같아서 기뻤다. 어차피 세상에서 끊임없이 여자 남자 구분 짓고 성별 역할에 대해 세뇌시키는데 반번호까지는 안 그래도 되잖아. 잘됐다. 정말 잘됐다.

반 배정표를 보고 나니 바람 쌩쌩 부는 운동장에서 애들이랑 2시간을 놀고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아주 아주 기쁜 일을 가슴에 품었기 때문일 거다.

모래를 잔뜩 묻히고 온 애들을 깨끗이 씻기고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보내다 자려고 누워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는 네가 누구하고도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또, 누구하고도 친구가 안 될 수도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친구가 되고 안 되고가 성별에 달려 있지 않으면 좋겠어."

늘 씩씩한 첫째는 큰소리로 대답한다.

"응, 그럼! 나 이미 그러고 있어! 난 웃긴 애들하고 친구해~"


그래. 너랑 비슷한 애들끼리 친구 먹는 거겠지.

부디 앞으로도 그렇게 자라날 수 있기를.


봄이 오나보다. 뺨에 닿는 바람이 차지 않다.

어린이들의 삶도 부디 차지 않기를. 쌀쌀하지 않기를. 평화롭고 따듯하기를. 더 많이 친구가 되기를.

날씨에 기대어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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