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말 오랜만에 만났잖아.
하나뿐인 동생과 1년에 1번 만나면 많이 만나는 사이인 건 사실 가혹한 일이야.
네가 스위스에 자리 잡은 지 벌써 3년이 넘었구나.
잠시 서울에서 머무는 너를, 나는 오롯이 만나고 싶었어. 3시면 하교하는 아이들을 맡기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어렵게 일정을 조정했지.
서울로 가는 기차에서 내내 생각했어.
내 동생을 만나러 간다고.
지금 나는 내 동생을 만나러 간다고.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버렸을까.
서울역까지 너는 나를 바래다줬지. 너도 처음와봤을 길들에서 길치인 나를 이끌고, 서울의 버스를 척척 타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정확히 짚어냈어, 넌.
너와 헤어질 때 슬퍼하는 티를 내거나 울지 않겠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어. 찡그린 얼굴이 내 마지막 얼굴이고 싶지 않다고. 웃으면서, 산뜻하게 헤어지고 싶다고.
집으로 가는 막차를 탔는데도 우리는 다... 얘기하지 못했잖아. 우리의 삶은 아주 잠시 겹쳐있다가 곧 떨어질 수밖에 없었어. 그걸 알면서도.... 알았으면서도.
너랑 헤어지면서 생각했어.
이 삶을 내가 선택했다고.
자식에게 어떻게 영어를 배우게 할지, 사교육을 어떻게 시킬지, 시간을 재서 수학문제를 매일 서른 문제 풀리고, 틀리면 닦달하는 - 한국에서의 전형적인 삶을 내가 직접 선택했다고.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해, 그렇게 하지 않을 걸 그랬다고 이제 와 불평하는 건 옳지 않다고. 공정하지 않다고.
그런데도 나는 자꾸 네 삶을 들여다본다.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해 보고,
어떤 방향으로 걸어갈 것인지를 깊이 고찰하고, 그곳으로, 외롭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기어이 걸어가고야 마는 네 삶을.
긴 출장을 마치고 나를 만나러 온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멀리서 네가 다가올 때.
누가보아도 한국 사람-그러니까, 삶에 찌든 얼굴이 아닌 사람, 자기 삶에 당당한 자유로운 한 사람이 걸어오는 것을,
내가 모르는 얼굴-몰랐던 얼굴이 걸어오는 것을 보며 속으로 많이 놀랐다는 걸.
네 얼굴이, 행동이 낯설고 이국적으로 느껴졌다는 걸.
나는 그걸 너에게 끝까지 말하지 못했어.
너를 동경하고 좋아해.
내가 누군가를 동경하는 동시에 미워하거나 질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너를 보며 알았어.
내 안에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잘 사는 모습, 삶을 기껍게 살아가는 모습에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걸 너를 보며 알았어.
그의 삶에 관여하거나 좌지우지하려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사랑하고 응원할 수 있다는 걸 너를 보며 느꼈어.
앞으로도 너는 그렇게 살아가겠지.
나는 살면서 내가 될 수 없었던, 그러나 너무나 되고 싶었던 생을 살아가는 네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론 안심하고 한편으론 부러워할 거야. 궁금해하고, 더 듣고 싶어 하고, 알고 싶어 할 거야.
너는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니까.
내가 되고 싶었던 그런 사람의 모습을 직접 목도하게 해주는 사람이니까.
살고 싶은 삶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마침내 선택하는 사람 말이야.
그게 너야.
너는 어릴 때부터, 모자 하나를 고를 때도 네가 아는 모든 가게를 둘러 보고, 때로는 두번 세번도 다시 가보고, 인터넷과 가격을 비교하고, 가진 옷과 어울리는지 꼼꼼히 따져보는 애였지. 그런 일을 귀찮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어.
나는 그러지 못했어. 그저 떠밀리는 대로 살았어. 내가 정말 뭘 원하는 것인지 꼼꼼히 따지길 귀찮아했어.
불평할 수는 없어. 지금도 사실 떠밀리는 대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미 많은 것들이 결정되어 버렸다고 느껴. 고민하지 않고 선택한 일들을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만 한다고 느껴.
거기에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야. 감사가 없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다만.
네 삶을 보면서.
함부로 떠밀리지 않고
쉽사리 휩쓸리지 않고
단단히 서서
자신만의 방향키를 잡는 네 모습을 보면서.
누가 뭐라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된 너를 보면서.
감히 내가 감히,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네게 도움이 안 되었던 내가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자랑스러웠어.
그저 눈부셨어.
너를 만나고 나서 내 마음에도 그 빛이 옮겨온 것을 느껴.
이 생이 다가 아닌 것을 느껴.
너는 그런 사람이야.
너는 그런 사람이야.
이 생이 다가 아닌 것을 알게 하는 사람이야.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