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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훈 Apr 28. 2016

소로의 <월든> 간소한 삶, 나만의 삶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필사적으로 서두르고 왜 그토록 무모하게 사는가?



그대의 삶이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맞부딪쳐 살아나가라. 회피하거나 욕하지 말라.

그대가 나쁜 사람이 아니듯, 삶도 그렇게 나쁘진 않다.     


그대가 가장 풍요로울 때에는 삶은 초라하게만 보인다. 불평쟁이는 낙원에서도 불평만 늘어놓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

삶이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그렇게만 한다면

그대가 비록 달동네의 형편없이 가난한 집에 있다고 해도 즐겁고 가슴 떨리며

멋진 시간들을 보낼 수 있으리라.     


황혼의 빛은 부자의 집 창문뿐 아니라, 가난한 집 창문도 밝게 비춘다. 또한 초봄에는 가난한 자들의 집 앞의 눈도 녹는다.


그대가 평온한 마음을 가지기만 한다면, 거기서도 궁전에서처럼 즐겁고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있으리라.


                ㅡ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중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 위치한 호수 이름이다.      

헨리 데이브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1845년, 그는 이곳에서 손수 5평짜리 오두막을 짓고 2년 2개월간 혼자서 지냈다. 그 삶의 기록을 남긴 것이 바로 <월든>이다.      


그는 자신이 숲 속에 들어간 이유를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 죽는 순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다던 소로. 이웃 사람들 모두가 하나 같이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삶은 없이 노동에만 전념하고 있을 때, 소로는 2년 2개월간 조그마한 통나무집에 들어앉아 때로는 수영하고, 때로는 산책하고, 때로는 친구들을 맞이하고, 또 때로는 책을 읽고 사유하며 시간을 보냈다.      


소로는 단지 유유자적한 일상을 보내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아무 방해 없이 자신만의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먹고 살 방편은 물론 스스로 강구했다.      


집도 스스로 지었고, 호두나 감자, 옥수수, 완두콩과 순무 등도 직접 경작해 먹었다. 돈이 필요할 땐 측량, 목수, 막노동 일을 해서 벌었다. 그리고 이렇게 산 결과, 그는 1년에 6주가량만 일을 하면 모든 생계비를 충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자유롭게 공부하는 데 쓸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뉴스를 보고, 스마트폰의 메시지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현대인들에게 소로의 이런 행동은 사실 ‘미친 짓’에 가깝다고 일축하기 쉽다.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가, 고향 숲 속 호숫가에서 오두막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이 사실이 놀랍고 신선하다기보다는 현실적응 장애, 혹은 패배주의에 침몰된 인간 유형이라고 생각하는 게 바쁘게 사는 현대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신은 소로를 독특한 생각을 가졌거나, 요즘 말로 까칠한 인간일 거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의 삶을 돌아보면 스스로 너무 바쁜 일상을 보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대개 사람이 바쁜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 다른 하나는 사람과의 관계다. 그러면서 우리가 일에 매달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이 일이고, 일의 성공이 곧 인생의 성공이라는 확신에서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 그 목표가 제대로 된 것일까 하는 의문과, 노력을 해도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들면 질주를 하던 인생길에 비상등이 켜진다. 이와 같은 고민을 소로는 이렇게 간명하게 표현한다.     

왜 우리는 그처럼 성공하려고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토록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것일까?      


당신이 젊다면, 이 문장은 큰 울림이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했으니.      


세월이 흘러, 인생의 희로애락을 경험하면서 나도 성공의 면을 보았고, 실패의 면도 보았다.

인간이라는 이름의 양지도 보고 그늘도 보았다. 인간과 세상을 입체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며 칭찬하는 삶은 그저 삶을 살아가는 한 방식에 불과하다. 하나의 길일뿐이다. 그 길을 제외한 다른 모든 방식의 삶을 우습게 여기며, 단지 조금 더 얻은 하나의 삶만을 과대평가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은 모두 자기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자신의 열정과 재능을 쏟아붓는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소로의 생각과 고민은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깊은 울림을 준다.     


가질수록, 상대와 비교하면서 더 불행하다고 여기는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그의 삶과 사색은 울림과 깨달음을 준다.


소로는 우리가 먼지가 되어 사라질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극단적으로, 우리가 모두 생업을 때려치우고 숲 속으로 들어가기엔 무리가 있지만, 귀기울일만한 말들이다.     


<월든>은 첫 장에서부터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든다.       


“내가 만나는 젊은이와 마을 사람들의 불행은 농장, 집, 창고, 가축, 그리고 농기구들을 상속받은 데서 온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일단 얻으면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차라리 광막한 초원에서 태어나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자신이 힘들여 가꾸어야 할 땅을 보다 더 맑은 눈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누가 이들을 흙의 노예로 만들었는가? 왜 한 팩의 먼지만 먹어도 될 것을 그들은 60 에이커나 되는 흙을 먹어야 하는가? 왜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무덤을 파기 시작하는가? 그들은 이런 모든 소유물들을 앞으로 밀고 가면서 어렵사리 한평생을 꾸려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     


"비교적 자유로운 이 나라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지와 오해 때문에, 부질없는 근심과 과도한 노동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 인생의 아름다운 열매를 따 보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돈을 벌려고 너무나 무리를 한 결과 끝내 사람들은 병이 들고 마는 것이다."     


소로는 필요 이상으로 벌기 위해서 삶을 노동에 희생시키는 문제를 지적한다. 그러한 '먹고살기 위한' 시간을 정말로 '살기 위해' 사용할 것을 권한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고,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묻는 것이다.

소로는 이렇게 한탄한다.      


“얼마나 많은 불멸의 영혼들이 이런 엄청난 짐의 무게에 짓눌린 채 연신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가!”      

소로가 그의 이웃을 보고 한탄했지만, 21세기의 오늘에도 그의 지적은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당시의 농장과 가축 등의 주력 품목이 기업과 공산품, 고급 아파트, 고급 자동차 등으로 바뀌었지만 이것들을 물려받거나 물려주려고 연신 숨을 헐떡거리는 불쌍한 영혼들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은 여전히 잘못된 생각에서 헛수고를 한다. 그들은 곧 인간의 우월한 부분까지 갈아엎어서 흙의 퇴비로 써버린다. 이것을 그들은 허울 좋은 운명―흔히 필요라고 부른다―을 구실로, 좀먹고 녹슬고 도둑이 침입해서 훔쳐갈 재화를 모으는 일에 종사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의 삶이니, 설사 전에는 모른다 해도 삶의 종말에 다다르면, 그들이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월든>에서 소로는 ‘절망의 송가’가 아닌 ‘희망의 찬가’를 써서 “이웃들의 잠을 깨우려는 간절한 소망으로, 횃대 위에 올라선 아침의 수탉처럼, 기운차게 소리쳐 보고자 한다.”      

하지만 소로가 보기에 이웃들의 잠은 깊기만 하다.       


“인간에게 신성(神性)이 있다는데 이게 어인 일인가! 밤낮 시장으로 상품을 실어 나르는, 노상의 마부를 보라! 그의 내부에 조금이라도 신성이 움직이고 있는가? 말에게 먹이와 물을 주는 것이 그의 최고의 의무 아닌가! 해운업자와 비교하건대 그의 운명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사람들에게 소로는 간소한 삶, 고독한 삶, 그리고 명상의 삶을 말한다.      


여기서 소로가 강조하는 것은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계속되어온 산업과 문명의 발전은 대부분 외적인 발전, 다시 말해서 의식주와 관련된 육체적 필수품의 발전에 집중된 나머지 정신적 필수품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거나, 아예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우리의 골격이 우리의 조상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정신 또한 그러할진대, 세상이 더욱 복잡해져 가는 지금, 우리의 조상들이 정신의 필수품에 쏟았던 것 이상의 관심, 아니면 적어도 같은 정도의 관심은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     


소로는 <월든>에서 육체에 필요한 것을 최소화하고, 대신 정신의 양식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삶다운 삶의 길이라고 그의 이웃들에게 말한다.      


그래서 소로는 이렇게 외친다.      


“간소화하라, 간소화하라. 하루 세 끼 대신에 필요하다면 한 끼만 먹고,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이고, 다른 것도 이에 비례해서 줄여라.”      


이것은 의도적인 삶이다. 즉, 우리가 만약 무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주체적인 삶이자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의도적인 삶일 것이다. 사회적인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주체적인 삶이야말로 성공적인 삶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소로는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소로의 인생은 재미있는 양상을 띠고 있다.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 쓴 <월든>이라는 책이 크게 성공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나 자신의 삶에 충실했고, 작가로서는 속세에서도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아이러니다. 사회적 성공을 멀리하고 자기 내면의 삶에서 성공을 찾기 시작했을 때, 삶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공까지 함께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월든을 방문한 법정스님


<월든>은 소로의 성찰이 잘 드러난다. 함께 음미해 볼 대목이다.


“아침은 언제나 나의 생활을 간소하고 순결하게 하라는 초대장과도 같았다.”      


“시간은 내가 낚시질하는 강을 흐르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의 얕은 물은 흘러가 버리지만 영원은 남는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지 못하게 살고 있다. 사회는 나를 구속하지만 자연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사회는 관습으로 옭아매며 관습적인 인간을 생산하지만, 자연 속에서 내려오는 빛과 바람은 그 관습의 사슬을  끊어 버린다. 자연 속에 있으면 사회에서 쓰던 대부분의 것들이 불필요한 것이 되어 버린다. 자연은 그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든다."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된 뒤에야 진짜 나의 일이 시작되었다. 사회 속에서 하는 일들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나의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반복하는 '남의 일'에 불과했다."


"그래서일까. '남의 일은 아무리 가벼워도 무거웠고, '나의 일'은 아무리 무거워도 가벼웠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쫓기듯이 인생을 낭비해가면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배가 고프기도 전에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 때의 한 바늘이 나중의 아홉 바늘의 수고를 막아준다고 하면서, 내일의 아홉 바늘의 수고를 막기 위해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다. 일, 일, 일... 하지만 우리는 이렇다 할 중요한 일 하나 하고 있지 않다. 단지 무도병에 걸려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 없을 뿐이다."     


“사람들은 병들 때를 대비하여 돈을 벌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다. 그 돈을 보관할 장소가 낡은 장롱이든, 벽 뒤에 숨겨 둔 양말 짝이든, 또는 보다 안전한 벽돌로 지은 은행이든 관계없으며, 금액도 크든 작든 관계없다. 그러나 돈을 벌려고 너무나 무리를 한 결과 끝내 사람들은 병이 들고 마는 것이다.”     


“피라미드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떤 야심만만한 멍청이의 무덤을 만드느라고 자신들의 전 인생을 허비하도록 강요되었다는 사실 말고는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가장 야성적인 동물이라 하더라도 편안함과 따뜻함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을 얻으려고 충분한 노력을 하기 때문에 그들은 겨울을 살아서 넘기는 것이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샐비어 같은 약초를 가꾸듯 가난을 가꾸어라. 옷이든 친구든 새로운 것을 얻으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헌 옷은 뒤집어서 다시 입고 옛 친구들에게로 돌아가라. 사물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우리들이다.”     


 <월든>을 읽다 보면 대개 소로가 쓴 글 한줄, 문장 하나 하나에  빠져들게 된다. 통나무집을 짓고는 살 수 없더라도, 번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고 싶은 유혹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월든>의 막바지에 소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결코 누구도 내 생활방식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제각기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소로가 여기서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을 '흐르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의도한 대로' 살아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삶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적어도 지금부터는 사회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아마도 소로가 말한 다른 북소리가 아닐까 싶다.     

모든 나무가 똑같지는 않다. 모두 떡갈나무처럼 빨리 성장해야 할 이유는 없다. 꽃도 마찬가지다. 큰 꽃도 있고 작은 꽃도 있다. 모두 같은 시기에 핀다면 세상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남들과 보조를 맞추려고 자신의 봄을 일부러 여름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소로가 말하는 것은 고독한 휴식, 관계의 단절을 통해 삶의 본질과 만나보라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의도한 대로 살고 싶다면. 그러면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소로는 월든의 오두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하다.


" 내 오두막에는 3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해,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을 위해서다."


소로는 '은둔자'는 아니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읍내도 나갔고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2년 여의 오두막 생활에서 3개의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홀로 생각하는 공간’, ‘다른 사람과 우정을 나누는 공간’, 그리고 ‘세상과 교류하는 공간’이 그것들이다.    

  

소로는 이 세 가지 '모두'를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위한 고독의 공간, 우정을 나누는 공간, 세상과 소통하는 공간-


그는 세상을 벗어난 은둔이 아니라 세상의 소란을 벗어나 침잠하되 성찰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바쁜 시대다. 왜 바쁜지도 잊을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분주함.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편리함을 주지만, 나를 잊게 하고 나의 고독과 침잠, '사색'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것을 소로는 일찍이 간파했다.      


"내적인 삶이 실패하는 만큼 우리는 더 쉬지 않고 그리고 절망적으로 우체국을 찾는다. 엄청난 양의 편지를 들고 자랑스럽게 우체국을 나서는 가련한 남자는 자기 자신에게서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우체국을 ‘핸드폰’으로 바꾸면 바로 우리 현대인의 모습이다.      


"내적인 삶이 실패하는 만큼 우리는 더 쉬지 않고 그리고 절망적으로 핸드을 찾는다. 엄청난 양의 SNS 들고 자랑스럽게 핸드폰을 든 이 가련한 남자는 자기 자신에게서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자기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홀로 나 자신과 대면해 대화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우리가 오두막으로 떠날 수 없다면 소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고독을 위한 의자'를 하나 마련해 정기적으로 그 의자에 앉아야 한다.      


‘우정을 위한 의자’나 손님을 위한, ‘세상을 위한 의자’는 우리에게 넘치도록 많으니까.       

소로가 말하는 간소하고 간소하고 또 간소한 삶. 이것은 부유해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유한 삶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단계의 수행이자 행복을 위해서이다.

    


서양의 '노자'인 소로는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 말한다.     


“진실로 바라건대 당신 내부에 있는 신대륙과 신세계를 발견하는 콜럼버스가 되라. 그리하여 무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상을 위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라. 각자는 하나의 왕국의 주인이며, 그에 비하면 러시아 황제의 대제국은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 얼음에 의해 남겨진 풀 더미에 불과하다.”     


'우리는 왜 그렇게도 악착같이 살아야 할까?'

단 한 번뿐인 인생, 평생을 말이다. 소로는 우리에게 이런 냉엄한 질문을 했다.           


월든 호숫가에서 햇볕을 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자기를 찾아나서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월든 호숫가에서 햇볕을 쪼는 동안 나는 내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월든 호숫가에서 햇볕을 쪼는동안 나 소로는 진짜 소로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월든 호숫가에서 햇볕을 쪼는 동안 '사회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자유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월든>은 전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소로를 영적인 스승으로 삼았다.

법정스님은 이 책을 사랑하였다.

여행가 한비야는 이 책을 추천하였다.  

        

그리고 당신은 이제 새로운 ‘나의 인생’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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