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한국시간 12:00 / 코펜하겐 16:04
지금은 코펜하겐에서 레이캬비크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다. 따로 노트북을 꺼내기가 어려워 시지프신화를 마저 읽었다. 부조리의 개념에 대한 설명까지는 공감하고 감탄하면서 따라갔는데 두번째 귀결인 자유에 대해서는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아마 나는 죽음을 실감해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때부터는 감정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문자를 따라갈 뿐이었다. 그래서 접었다. 안다는 건 느껴보았다는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동안 부조리의 감정을 확신하지 못해 나의 지적 탐구욕과 세계의 불확실성을 옮겨다니며 나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가 부조리를 선언했을 때, 나는 그 부정으로 부터 해방되었다.
아마 삶이 계속되는 와중에서 나는 이 책을 다시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 레이캬비크에 도착했다. 작은 항공기는 기압의 차이가 심하게 느껴진다. 고막이 터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침을 아무리 삼켜봐도 귀가 어딘가 이상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한국시간 01:30
와. 비행기 놓친 줄 알았다. 아이폰이 이제 나라를 인식하지 못했는지. 하필이면 레이캬비크에 내릴때 아이폰이 시간을 잘못 읽었다. 아마 코펜하겐 시간에 머물러있는 듯 하다. 다음 비행기 시간에 딱 10분 남겨서 내린 것으로 오해했다.
놓치면 못탈까봐 A2게이트로 막 뛰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간신히 입국장으로 나가서 에어그린란드를 찾았는데 영어가 막혀서 허둥지둥 대고 마침 카운터에는 한 사람밖에 없어서 엄청 오래 기다렸다. 연결편이라 보상은 되겠지 했어도 식은땀을 흘렸다. 다행히 시간을 착각한 것이었다. 아 그린란드는 이제 물건너 간건가. 내가 여행자보험을 뭘 들었더라. 나혼자 레이캬비크에서 남겨지는 건가. Anette한테도 놓쳤다고 말해야하나. 많은 생각을 했다.
출국심사를 마치고 제시간에 도착해서는 버스를 타고 비행기로 가고있다. 계속 허둥댔다. 에어그린란드 체크인 하는데가 어디냐고 물어봤었던 그 안내요원이 갑자기 출국장 안내센터에 앉아있다. 처음에 내게 뭐라 했는데 못알아 들어서 다시 물어보니 "Nationalality?" 그러길래 나는 내가 어디서 온 여행자인지 관심을 보여주는 듯 해서 잠시 머뭇대다가 "Oh! Korea"라고 했더니 "Thank's" 그러고 말았다. 한박자가 늦어 영어를 잘 못해서 그냥 보내는가 보다 했는데 알고보니 오는 사람마다 다 물어보고 있었다. 창피해서 빨리 빠져나왔다.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아 너무 감사하게도 여긴 우리나라처럼 출국장 안쪽에 흡연실이 있었다. 두개피를 피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허둥지둥 대면서 하반신만한 캐리어를 들고 뛰느라 땀이 났는데 흡연실은 건물 바깥에 돌출되어 찬 바람이 훅 들어왔다. 처음 느껴보는 아이슬란드의 추위다. 이래서 다들 핫팩 챙기라 하는구나 했다.
탑승 게이트를 지나고 보니 동양인은 나밖에 없다. 뭔가 신기하게 보는 것 같다. 버스타고 이동하는데 활주로의 해질녘이 너무 예뻐서 넋을 놓고 봤다. 타는 사람이 채 열명남짓이다. 서로 아는지 인사도 한다. 승무원하고도 아나보다. 승무원은 한명이다. 게다가 날이 무척 추웠다.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난다. 이것만 타면 이제 그린란드로 간다. 거기는 여기보다 어둡겠다. 그 빨간 비행기다. 엄청 작다. 낯섦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졌다.
한국시간01:50
오른쪽 앞좌석에 어떤 여자는 논문 같이 생긴 페이퍼를 읽고있다. 여기에도 저마다의 사람들이 삶을 지탱하기위해 직장이 필요하겠지. 그것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어땠을까. 우리나라와는 어떻게 다를까. 꿈을 찾아야 하고,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돈도 일정정도 이상 벌어야하고, 아!, 일과 삶의 균형도 맞춰야하고. 그런 것들을 생각할까.
어째 아까 허둥지둥 댔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지 않는 것 같다. 심호흡을 하면서 잡념을 없애본다. 흩어진 마음은 심호흡 몇번으로 금방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빠르게 찾아지지 않는다고 조급해하지 않고 가만히 마음을 계속 응시하고 있어야한다.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급함을 버리고 끝까지 지켜볼것. 조급함이야말로 정신의 가장 큰 적이 아닌가 했다.
현지시각 그린란드 12.10 10:21(너무 졸려서 다음날에 썼다)
누크에 내려서는 바로 숙소로 왔다. 해가 완전히 졌고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여기까지 꼬박 40시간이 걸렸다. 택시기사한테 주소를 보여주니 바로 알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도시 같은 모습이었고 규모도 생각보다 컸다. 마트도 있고 아파트도 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나오는 전통가옥들이나 펍에 나라 사람들 다 몰려있는 그런 시골은 아니었다. 물론 그곳은 더 위로 가야하는 곳이고 여기는 누크니까. 영화에 나오는 파파존스는 물론 없었다. 택시를 타고 숙소 앞에 도착했다. 바다 너머의 불빛들이 보인다.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고 깜빡거리지 않는 얌전한 불빛들이 가만히 반짝인다. 공항에서 걸어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에서 내리는데 마침 아파트에서 누가 나오길 래 반갑게 웃으며 Anette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미안합니다. 거의 악수할 뻔 했다. Anette는 내가 묵는 에어비앤비의 호스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현관문을 열고 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호스트 얼굴을 처음 봤다. 할머니셨다. 짐을 놓고 나니 내게 커피를 내려주었다. 탁자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나는 내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그녀도 신나서 우리나라로 치면 ‘장승’하고 같은 의미의 그린란드 전통피규어들을 진열장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에일리언을 ‘모에화’ 한 것 같은 이상한 조각품들이었다. 그녀는 이걸 수집한다고 했다. 게 중에는 효자손으로 쓸 것 같이 생긴 것도 있었는데 마침 Anette가 이거 효자손처럼 사용하기도 한다며 등을 긁었다. 옛날 이누이트들도 효자손이 필요했나보다. 나는 이걸 캐릭터상품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괜찮다는 생각을 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진열장 위에는 몇몇 액자들이 있었는데 그녀의 고조할아버지의 흑백 사진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어머니 사진이 없는 이유는 따로 묻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집은 Anette의 청결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 했다. 방에는 식탁 겸 데스크 하나, 작은 티비 하나, 일인용 쇼파 하나, 그리고 부엌과 전통 장식장 하나가 있었다. 특이한 건 그 가구들 위에 먼지가 없다는 것이다. 식탁과 화장실에는 물기가 하나도 없었다.(그건 정말 level 8정도의 단계 아닌가.) 그녀는 내게도 샤워 후 물기를 없애줄 것을 부탁했다.(샤워 후, 배수구에 머리카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나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이건 level 9정도 되는 것 같다.) 마음에 드는 것은 형광등은 없고 다 간접조명뿐이라는 것과 블라인드 없는 통유리 창으로 누크의 바다와 도시의 불빛 그리고 날씨를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최고였던 것 같다.
그녀가 알려 준대로 길을 따라 슈퍼마켓에 가서 장을 좀 봐왔다. 이곳의 물가는 정말 듣던대로다. 칙쵹 같이 생긴 과자가 무려 한화로 6천원이었다. 심지어 촉촉하지도 않은 녀석이 말이다. 무엇을 사야할지 몰라 인스턴트용으로 잔뜩 사왔는데 그녀의 집엔 전자렌지가 없다는 걸 나중에 알고 낙심했다. 결국 오븐으로 인스턴트 피자 한판을 구워볼까 하며 오븐을 삑삑 눌러대고 있었는데 결국 그녀가 도와주었다. 그리고는 바로 잠에 들었다. 꿈도 안 꾸고 푹 잔 것 같다. 지금은 아침이고 눈이 많이 온다. 이제 슬슬 나가봐야겠다.